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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책 사달라" 전재산 내놓은 하와이 한인 노부부

Shawn Chase 2017. 2. 10. 14:45

입력 2017.02.10 10:35



암투병 문유진·문숙기 씨, 현지 공립도서관에 100만 달러 쾌척
"2세들 돈걱정 없이 한국책 봤으면"..주지사 '한국관' 마련 약속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미국 하와이 거주 한인 노부부의 '한국책 사랑'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문유진(82)·문(김)숙기(76) 부부는 무일푼으로 미국에 건너가 정착해 살면서 평생 모은 돈의 거의 전부를 "하와이 매컬리 모일릴리 공립도서관이 한국 도서를 구매하도록 하는데 써달라"며 최근 100만 달러(약 11억 4천690만 원)를 쾌척했다.

전달식은 지난달 말 데이비드 이게 하와이주지사 사무실에서 부부와 강영훈 하와이 총영사, 주의회 의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기부금은 부부가 설립한 한국도서재단에 전달됐고, 앞으로 공립도서관이 한국 도서, 잡지, DVD 등을 살 때 전액 지출하게 된다.

이게 주지사는 "문 부부의 오랜 기여로 한국 관련 책자와 잡지,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DVD를 도서관에 비치할 수 있었다"며 "하와이 거주 시민이 한국 책을 접할 기회를 제공했다"고 고마워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앞으로 2년 뒤 공립도서관의 한 층을 '한국관'으로 만들기로 하고 예산을 책정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문숙기 할머니는 10일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우리는 무일푼으로 미국에 건너와 남편은 공무원으로 평생을 보냈고, 저는 와이키키 해변에서 보석 장사를 하며 살았다"며 "자식과 손자에게 유산을 남기는 것보다는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더 값지다는 생각에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외하고 전 재산을 내놓았다"고 말했다.

이어 "이미 10여 년 전부터 (재산 기부) 계획했던 일을 실천한 것뿐"이라며 "그동안 소수민족이어서 받았던 차별의 한을 풀고 싶었다. 앞으로 한국 관련 도서가 도서관에 더 많이 비치돼 한국이 역사와 문화가 있는 나라로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부부는 서울 출신이다. 문 할아버지는 동국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원조기관인 국제개발처(USAID)에서 근무하다 1961년 미주리주립대로 유학을 갔다. 졸업 후 시카고 선타임스에서 근무하다 3년 뒤 하와이 일본의 한 신문사 영문담당 기자로 발탁돼 하와이 호놀룰루에 이주했다.

기자를 그만두고 1968년부터 호놀룰루 시청 공보관을 시작으로 공보실장, 시의회 사무장, 시장실 민원실장 등 시 공무원으로 18년간 일했으며 미 해군수사국으로 자리를 옮겨 6년간 한국 근무를 했다. 1996년부터 연방수사국(FBI)에 들어가 2007년 대장암에 걸려 은퇴하기까지 39년 동안 공직 생활을 했다.

할머니는 1981년 하와이로 여행을 갔다가 남편을 만나 결혼해 정착했다.

부부의 한국책 사랑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6년 어느 날. 주 정부가 예산 부족으로 한국어 도서 구매비 연간 2천300달러를 전액 삭감했다는 신문기사를 접한 이들은 안타까움을 견딜 수 없었다.

할머니는 곧바로 담당 공무원을 찾아가 항의했고, "소수민족을 위한 예산이 부족한 데다 한국 도서를 대여하는 사람도 없다"는 어이없는 변명을 듣고는 그 공무원에게 '소수민족도 예외 없이 주 정부에 세금을 성실히 내는데 왜 그들을 위한 예산 지원이 부족한 거냐'고 따져 물었다.

하지만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국 도서를 공립도서관에 꽂아야겠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남편과 의논한 뒤 다시 그 공무원을 찾아가 한국 도서를 사 달라고 부탁하며 2천500달러를 놓고 왔다.

"몇 달 뒤 도서관 담당자가 사들인 책들을 확인하라고 연락이 왔어요. 가서 확인하는데 주 정부가 한국 도서를 사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죠. 글쎄 담당자들이 한국에서는 권당 1만 원가량 하는 책을 3∼4배 비싼 가격으로 현지에서 사고 있었던 거예요."

부부는 더 많은 책을 사기 위해 주 정부를 대신해 직접 한국 도서를 사들여 도서관에 비치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흔쾌히 받아들여졌다. 국내 대형서점에 연락해 무려 710권의 도서를 샀으며 항공사를 설득해 무료로 운송했다.

그러나 구매한 책을 진열하려면 전문 사서가 필요했는데 주 정부는 예산 부족을 내세워 책을 방치했다. 할머니는 직접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해 책을 일일이 꽂았다.

이후 부부는 1997년부터 지속해서 한국 도서를 사들였고, 도서관 내 한국 도서를 관리하고 운영할 자원봉사자도 모집해 운영했다. 2005년에는 '한국도서재단'을 설립해 지속해서 주 정부에 의견을 제시하고, 한국 도서 구입 예산도 따냈다. 이와 함께 하와이 동포, 한국 정부, 한국 기업을 대상으로 모금을 추진해 매년 3만 달러 정도의 도서 구매비를 확보했다.

1996년 한국 도서가 200권에 불과하던 도서관에는 2017년 현재 3만 권이 넘는 책이 꽂혀 있다. 미국 전역의 주립 도서관 가운데 가장 많은 한국 도서를 비치한 도서관이 됐다.

할아버지는 대장암, 할머니는 2000년 갑상선암, 유방암에 이어 2010년 폐암 말기 선고까지 받고 현재 투병 중이다.

"20년간 고생을 많이 했어요. 2세들은 돈 걱정 좀 하지 말고 한국 책을 봤으면 하는 생각에 우리 부부의 전부를 내놓은 겁니다. 저는 이제 죽을 때가 됐어요. 재산을 기부하는데 흔쾌히 허락한 남편과 자식들에게 고마울 뿐이죠."

ghwa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