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10.22 03:00
[송혜진 기자의 느낌] 25년 선수생활 은퇴한 '골프 여왕' 박세리
"골프, 처음엔 별로였지만… 세계 1등 해보고 싶어 매진"
1년 중 9개월은 호텔 떠돌아… 화려했던 삶? 그런 건 기억 하나도 안나
"돌아보면 25년 동안 짐 싸고 푸는 일만 반복했던 것 같아요. 꽤나 화려한 삶을 산 것 같지만 정작 그런 건 기억이 하나도 안 나고, 그저 짐 싸서 이동하고 짐 풀고 연습하고, 경기하고 우승하거나 떨어지고, 다시 짐 싸고… 그랬던 것만 생각나요. 1년 12개월 중 9개월씩 호텔을 떠돌았으니 집에 와도 어쩐지 불편했었죠. 그땐 그게 또 내 업보이자 운명이려니 했어요."
박세리(39) 눈가에 얼핏 물기가 돈다. 골프 여왕은 이제 막 또 짐을 풀었다고 했다. 최근까지 미국에서 주로 생활했던 박세리다. 선수 생활 은퇴를 선언하면서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팜 데저트와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각각 한 채씩 사놓았던 집을 처분하고 대전 부모님이 사는 아파트의 같은 동에 거처를 새로 마련했다. "아직까진 집이 어색하지만 이것도 곧 익숙해지겠죠. 일단은 좀 즐겨보려고 해요. 이젠 정말 다 끝났다는 것, 그리고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사실 그 자체를요." 방금 청소를 끝낸 듯 홀가분한 목소리였다.
지난 13일 박세리는 인천 영종도 한 골프장에서 지난 25년 선수 생활의 마침표를 찍는 은퇴식을 가졌다. 평일이었는데도 여왕의 마지막 경기를 보려고 수천 명의 팬이 몰렸고, 박지은·박인비·리디아고 같은 선수들과 야구선수 출신 선동열과 박찬호가 찾아왔다. 박세리는 이날 꽃다발을 품에 받아든 채 내내 눈물범벅이었다. '고마워요 세리' '사랑해요 세리' 같은 글귀가 새겨진 모자를 쓰거나 수건을 들고 "박세리 파이팅"을 외치는 팬들을 바라보며 그는 "나는 정말 행복한 선수"라고 말했다.
지난 17일 인천 한 호텔에서 박세리를 만났다. 햇살이 빗금을 그리며 떨어지는 오후, 박세리에게 "그날 참 많이 울더라"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는 피식 웃었다. "저 원래 눈물 많아요. 오랫동안 안 울려고 애썼을 뿐이죠…." 말을 마친 여왕의 눈가가 어느새 또 슬쩍 젖어드는가 싶었다.
골프 여왕, 마지막 짐을 풀다
―선수 시절엔 눈물 한 방울을 안 흘려서 '철(鐵)의 여인'이라고 불렸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하하하, 모르겠네요. 요새 왜 이렇게 눈물이 많아졌는지. 이번 은퇴식 전날 밤부터 그렇게 울었어요. 마지막이라는 생각 하니 눈물이 그치질 않더라고요. 사실 3년 전부터 은퇴를 준비해오긴 했지만 이날 은퇴식 무대에 서기 전까진 제대로 실감을 못 했나 봐요. 그날 필드에 섰을 때 수많은 분들이 환호를 보내줬는데 그 순간 가슴이 탁 막혔어요. '진짜로 끝이구나' 싶은 생각과 '아, 나는 정말 마지막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떠나는구나' 하는 마음 때문에요. 전 세계 어떤 선수가 이런 환대와 사랑을 받고 떠날까 하는 생각에 눈물이 계속 흘렀어요. 얘기하니까 괜히 또 눈물 나려고 하네(웃음)."
―외신들도 관심이 많았죠.
"외신 기자들 질문이 다들 '어떻게 이렇게 큰 환대 속에서 떠날 수 있었던 것 같으냐'였어요. '1998년 우리나라가 힘들었을 때 내가 US오픈에서 우승하면서 국민들에게 희망을 줬고, 우리나라 골프가 그 이후로 새로운 길을 걸었던 덕분인 것 같다'고 대답했죠. 그 대답을 하면서 또 새삼 가슴이 벅찼어요. 돌아보니 정말 그랬거든요."
이날 AP통신은 '박세리가 눈물 속에 홈 팬들의 환대를 받으며 명예의 전당에 가입했던 선수 경력을 마무리했다'고 했고, 골프위크는 '이번 시즌 34명의 한국 선수가 LPGA 투어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27명이 우승 경력이 있다. 박세리가 1998년 US오픈에서 우승한 것은 한국 골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고 보도했다.
"하하, 마흔이 다 됐는데도요? (잠시 말이 없다가) 네, 솔직히 말해 더 할 수도 있었죠. 아마 후배들이 없었다면 선수 생활을 더 오래 했을 거예요. 그런데 이미 훌륭한 후배들이 많고, 이젠 그런 후배들을 위해 내가 다른 일을 시작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훌륭한 선수로 남는 것도 좋지만, 이젠 존중받는 선배로 남고 싶은 욕심? 뭔가 다른 판을 짜고 싶은 마음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무리 박세리라도 그걸 단번에 잘할 리는 없으니, 마음먹은 이상 빨리 준비해야겠다 생각했고, 그래서 은퇴를 결심한 거죠."
―이젠 후배들을 위한 판을 짜보겠다는 거죠?
"네, 이젠 우리나라에서도 골프 훈련을 체계적으로 제대로 받을 수 있는 환경을 한번 만들어 보고 싶고요. 나 혼자만 챙기는 걸 넘어서서 다른 사람도 챙기면서 살아보고 싶어요. 골프가 워낙 개인적인 운동이라서 지난 25년은 혼자 도 닦듯 살았지만, 남은 시간은 후배들과 섞여 좀 다르게 살아보고 싶은 거죠(웃음)."
박세리는 1989년 대전 유성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 박준철씨 권유로 골프채를 처음 잡았다. 세 자매 중 둘째로 태어난 박세리는 세 딸 중 유일하게 탁월한 운동신경을 자랑했고,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육상선수로 뽑혔다고 했다. 어머니는 "운동하면 얼굴 까맣게 타서 못쓴다"고 펄쩍 뛰었지만 정작 박세리가 선수로 뛰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달리기만 하면 1등을 하는 게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 딸의 남다른 체력과 승부 근성을 유심히 보던 아버지가 어느 날 골프 연습장에 데려가 골프채를 한번 잡아보게 했고, 딸의 스윙을 보고는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러나 박세리는 처음엔 골프가 영 별로였다고 했다.
―뭐가 마음에 안 들었죠.
"혼자 하는 운동이잖아요. 연습장엔 웬 아저씨들뿐이고. 반면에 육상은 친구들하고 같이 뛰니까 얼마나 재밌어요. 쉬는 시간에 또래 아이들과 조잘조잘 같이 수다도 떨 수 있고, 끝나고 종종 몰려다니면서 떡볶이를 먹으러 가기도 했는데, 골프는 온종일 혼자 해야 되잖아요. 이걸 왜 하나 했죠."
―그런데 왜 시작했나요.
“아버지 친구 한 분이 저를 중1 때 아마추어 골프대회에 데리고 갔어요. 거기서 ‘한국 중학생 가운데 골프를 가장 잘 친다’면서 김미현을, ‘한국 초등학생 중에는 얘가 제일 잘한다’면서 한희원과 인사를 시켜주셨죠. 그때 찌릿찌릿 전율이 왔어요. 누가 나를 소개할 때 ‘얘가 한국에서 1등이야’ 이러면 얼마나 멋질까 싶더라고요. 아버지에게 ‘나는 세계 1등이 돼보겠다’면서 골프를 치겠다고 조르기 시작했죠.”
박세리는 그날 이후 소위 지옥훈련을 자진해 견뎌가며 연습에 매진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플레이를 하기 위해선 다리가 튼튼해야 한다. 아파트 15층 계단을 매일 다섯 번씩 오르락내리락했고, 집안에서 뒤꿈치를 들고 까치발로 걸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골프장에서 나오지 않았다. 매일 1000번 넘게 스윙 연습을 했다고 했다.
“이유가 있었거든요.” 박세리는 한숨을 쉬었다. “당시 아버지 사업이 크게 기울었어요. 아버지는 제게 절대 티를 안 내셨고 묵묵히 제 골프 훈련을 지원해주셨지만, 연습을 늦게 마치고 아버지 사무실에 갔다가 아버지가 통화하는 걸 듣게 된 날이 있었어요. 그 전화 내용이 제가 듣기에도 심상치 않았죠. 아버지 사업이 잘될 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는 것도 봤고요. 어린 나이에도 또렷한 충격이었어요. 그때 생각했어요. 빨리 성공해야겠다고. 저들에게 내가 잘되는 걸 꼭 보여주겠다고. 공 하나하나 칠 때마다 그야말로 절박하게 이를 악물고 쳤죠.”
박세리는 그렇게 중학교 3학년이던 1992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서 첫 승을 올리고, 1995년 KLPGA투어 12개 대회에서 4승을 올린다. 1996년엔 프로로 데뷔, KLPGA투어 상금왕이 된다. 1997년엔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LPGA투어 퀄리파잉스쿨을 수석으로 통과했고, 1998년 LPGA투어에서 한국인 최초로 신인상을 받았다. 같은 해 박세리는 US여자오픈에서 우승을 한다. 골프공이 물에 빠지자 양말을 벗고 물에 들어가 샷을 해서 우승을 했던 경기다. 2001년엔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 우승을 했다. 2000년 초까지 박세리는 그야말로 매일 아침 눈 뜰 때마다 새로운 신화(神話)를 쓰고 있었다.
―1998년 당시 마트에서 파에다가 ‘박세리 언더파’라는 이름을 붙여 팔던 게 기억납니다. 그야말로 박세리 시대였죠.
“하하, 돌아보면 운이 좋았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운동신경이 좋은 것도 있었고 한눈 안 팔고 죽도록 운동만 한 것도 있었지만, 운이 받쳐준 것도 있죠. 하나라도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얘기예요.”
―US여자 오픈 우승할 때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스물한 살이었네요. 그 엄청난 국민적 관심과 기대가 힘들 나이가 아니었나요.
“그렇진 않았어요. 경기를 치를 때는 갤러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들이 제 공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오히려 에너지를 더 받았다고 해야 되나. 아마추어 때부터 저는 경기 규모가 클수록, 갤러리가 많을수록, 팬들이 몰려들수록 경기를 더 잘 치러냈어요. 그걸 즐길 줄 알았던 것 같아요. 타고난 담대함은 있었던 거죠. 다만 유명해지면서 여기저기 불려다녀야 했는데, 몸은 하나이고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으니 그게 점점 힘들어졌죠.” 1998년 박세리는 미국에서 경기를 치르자마자 한국으로 밤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다음 날 또 다른 경기에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결국 탈진해 쓰러지기도 했다. 박세리는 “그때 죽을 만큼 아팠던 탓에 지금도 기관지가 좋지 않다”고 했다.
―그렇게 대회에 출전하고 우승을 거듭하는 내내 즐겁고 행복했나요.
“아뇨, 그땐 몰랐어요. 내가 어느 순간부터 즐기지 못하게 됐다는 걸…. 그땐 미국에서 부모님도 없이 활동하면서 세계적인 선수들과 싸울 때니까 정말 나 혼자서 완벽하게 내 몸을 관리해야만 했거든요. 스케줄을 얼마나 지독하게 짰는지 몰라요. 어느 정도였냐 하면, 지금은 컨디션이 최상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슬럼프가 올 것이라는 걸 생각하고 거기에 맞춰 휴식과 식이요법을 미리 계산해서 내 몸을 통제할 정도였어요. 그야말로 가장 완벽한 틀 안에 나를 가둬놓은 거예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아무리 이렇게 나를 관리해도 슬럼프는 와요. 상관없이 와요. 왜 오냐…. 아프면 아프다, 힘들면 힘들다,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슬럼프가 오질 않는데, 이렇게 나를 관리하다 보면 어느 순간 스스로 최면을 걸게 되거든요. ‘지금 괜찮아’ ‘지금 정말 잘하고 있어’ 이렇게요. 결국 내 몸을 속이고 학대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다가 무너지는 거죠.”
아플 때 아프다고 말하는 용기
느닷없는 슬럼프는 박세리를 주저앉혔다. 80대 스코어가 자주 나왔다. ‘국민 영웅’이라고 칭송하던 사람들은 그를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 “주말 골퍼”라는 비아냥거림이 나왔다. “연습을 게을리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박세리는 “필드에 서 있는 것 자체가 싫을 정도로 힘들었다”고 했다.
―다들 말을 참 쉽게 하죠.
“정말 실컷 놀았으면 억울하지도 않았어요(웃음). 누구보다 기를 쓰고 있는데 ‘술을 먹었네’ ‘운동을 안 했네’ 하니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다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까’ 싶었죠. 불행 중 다행으로 그때 손을 다쳐서 쉬게 됐는데 그때에야 비로소 내 곁에서 끊임없이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보이더라고요. 그때 난생처음 쉬면서 동네 분들 따라 낚시도 가보고 수다도 떨고 그랬어요. 그 전에는 여행도 가본 적 없었고 속마음을 주위 사람에게 말해본 적도 없었어요.”
―스트레스를 삭일 취미조차 없었나요.
“없었어요. 실은 지금도 없어요(웃음). 그런 걸 깨칠 마음의 여유가 없었어요. 그런 건 다 낭비라고 생각하고 죽도록 훈련하고 운동만 했던 거죠. 그러다가 슬럼프를 겪으면서 비로소 알게 된 거예요. 내가 나 자신을 더 아껴주지 못해서, 주위를 더 돌아보고 쉬어갈 줄 몰라서 그런 시간을 겪고 있다는 걸요.”
2006년 박세리는 부활한다. 메이저대회 LPGA 챔피언십에서 호주의 카리 웹을 연장전에서 꺾고 우승하면서부터다. 그는 이후 2차례 더 우승했다. 2007년엔 한국인 최초로 LPGA 명예의 전당에 가입했다.
―결국 슬럼프를 겪으면서 박세리라는 사람이 누군지 비로소 깨달았다는 거네요.
“네. 나란 사람도 남들과 다를 바가 없더라고요. 힘들면 울고, 즐거우면 웃는 사람이었는데 그동안 나는 그런 것에 초연한 사람인 척 살아왔어요. 남들보다 강하다고 믿었어요.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나도 약하다는 걸, 나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걸, 나도 더 행복해지고 싶다는 걸 알았어요. 그걸 알고 나니 편해졌어요. 그때부터 비로소 공을 치는 게 즐거워졌고요(웃음).”
내가 걷지 못한 길
박세리는 내년부터 후배들을 위한 골프 아카데미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선수 개개인의 키와 몸무게, 체형에 따라 훈련 프로그램을 맞춤으로 짜주고 체계적으로 관리해주는 거죠. 체력 관리해주는 것을 넘어서서 정신 상담도 해주고요.”
―선수 시절 홀로 습득하고 터득해온 노하우를 후배에게 전해주고 싶은 건가요.
“골프는 참 외로운 운동이지만, 그래도 선배가 있다면 좀 낫겠죠. 내가 겪었던 그 지독한 외로움을 후배들은 좀 덜 겪을 수 있겠죠(웃음).”
―올해 리우 올림픽에서 여자 골프 감독으로 섰을 때 모습이 참 따뜻해 보였어요.
“선수들 어깨에 놓인 무게가 어떤 건지, 나는 잘 아니까요. 박인비 선수가 마지막 퍼팅을 성공하고 양손을 들었을 때, 그동안 얼마나 심적으로 힘들었는지…. 그걸 아니까 눈물이 났어요. 그동안 저는 혼자 견뎠고 그래서 더 외로웠지만, 후배들과는 그 부담도 무게도 나누고 싶어요. 나눌 수 있고, 외롭지 않을 수 있어요. 스물한 살의 제가 잘 몰랐을 뿐이죠.”
마흔을 앞둔 박세리에게 다들 연애와 결혼 계획을 묻지만 어쩐지 그 질문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질문 너무 많이 받지 않느냐”고 했더니 박세리는 “뭐 인연을 만나면… 기왕이면 누구와도 물처럼 잘 섞이는 사교적인 사람과 만나서 살고 싶다”고 했다.
―오랫동안 외로움을 견디며 선수 생활을 해온 만큼, 내겐 없는 부분을 가진 사람을 원하는 걸까요.
박세리는 “그런 것 같다”고 하더니 “어쩌면 내 인생은 지금부터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동안 소나무처럼 홀로 지냈다면 이젠 여러 그루의 나무들과 함께 지내야 되는 시기가 온 거겠죠. 그래서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지만 일단은 즐기려고요(웃음).” 박세리의 그 숲이 문득 기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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