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나는 감히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북한 3대 세습을 가능케 했다고 말할 수 있다"

Shawn Chase 2015. 8. 14.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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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7.08 10:15 | 수정 : 2014.07.08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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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정부와 주민들은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면서부터 적화통일에 대한 큰 기대와 희망을 품었다. 원래는 그 전에 김영삼과 김대중의 민주세력이 단합하여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는데 중점을 두고 대남작전을 하다가 두 김씨의 분열로 노태우씨를 이기지 못하였기 때문에 희망이 안 보인다고 했다.

이어 1992년 김영삼씨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에 대해 민주주의의 배신자라고 하면서 노동신문의 사설과 논평을 통해 욕을 많이 했다. 그러면서도 김일성은 1994년 서울에 가서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겠다고 했다. 김정일은 이에 완강히 반대했었다.

그러다가 1998년 김대중씨가 당선되자 일체의 시비중상을 중지하고 지켜보다가 한국에서 햇볕정책으로 나오자 기회라고 여기고 북한에서 주장하는 외유내강의 작전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남한의 북한지원정책은 1984년 10월 한국에서 수재(水災)가 발생했을 때 북한이 약간의 지원을 해온 것에 대한 보답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초기 북한지원정책은 무엇보다 한 겨레, 한 동포라는 차원에서는 대단히 의미있는 정책이었다.
1984년 북한은 남한의 수해 복구와 경제교류를 지원하기 위해 쌀과 시멘트 등을 판문점과 인천, 북평항을 통해 남쪽으로 보내왔다.
1984년 북한은 남한의 수해 복구와 경제교류를 지원하기 위해 쌀과 시멘트 등을 판문점과 인천, 북평항을 통해 남쪽으로 보내왔다.
하지만 북한당국은 남한 정부와 국민들의 아낌없는 지원에 호응해 응당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에 기초한 평화통일 방향으로 나아가야 했는데도 오히려 핵무기와 인간살육무기 연구와 개발을 시작했다. 김정일은 나아가 남남갈등을 조성하고 대립과 분열, 적화통일의 길로 내달았다.

북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집권 시기의 햇볕정책은 김정은 3대 세습을 가능케 했다. 왜 그렇게 볼 수 있는가?

1995년 하순부터 북한에서는 식량 배급과 생활필수품 배급이 거의 중단됐다. 배급체제로 지탱되던 북한 체제 자체가 붕괴될 긴급 상황에 놓인 것이다.

일반 기관과 기업소는 물론이고 군인들과 군수공장, 심지어 중앙기관조차 식량 확보를 못해 조직 붕괴 임계점까지 도달하였을 때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취임(1998년 2월)하면서 김정일 정권은 기사회생하게 됐다. 이후 중국의 일정한 지원과 2000년 7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북한 방문도 북한 체제 회복에 도움이 됐다.

그 당시 러시아가 북한에 40만Kw의 전력을 무상지원해주겠다고 하였으나 북한에는 그만한 용량의 전력을 받을 만한 변전소가 없었다. 북한은 중국에게 그 전기를 받아 분리하여 북한에 공급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으며, 결국 러시아 전기를 받을 수 없었다.

김정일은 이산가족상봉을 전제조건으로, 또 핵무기를 포기한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한국정부로부터 끊임없는 지원을 받기 위해 노력하였었다. 그러나 한국과 유엔이 지원한 식량과 기타 모든 물자들은 주로 중앙기관 간부들과 군수공장 직원들, 군인들에게 지급됐다. 굶주리는 일반 주민들에겐 마지못해 총 지원량의 극히 일부만 지급됐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의 북한방문은 전쟁까지 치른 남과 북이 냉전상태에서 평화체제로 나아갈 수 있는 획기적인 사변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영구집권과 사치를 위해 동족의 아낌없는 성의를 악용한 김정일에 의해 정상회담은 오히려 역사의 오점이 되었다. 또 김정일의 비열한 거짓과 기만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비전향 장기수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냄으로써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의심과 불만이 싹트고 있던 북한 주민들에게 ‘사회주의는 승리하고 자본주의는 멸망한다’는 오판을 다시 하게 만들었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하는 모습(위)과 7년 뒤인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시 4.25 문화회관 광장에서 김 국방위원장과 만나 악수하는 모습.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하는 모습(위)과 7년 뒤인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시 4.25 문화회관 광장에서 김 국방위원장과 만나 악수하는 모습.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평양방문과 6·15, 10·4 공동선언은 동족상쟁을 막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였으나 김정일은 그것을 악용하여 오히려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방문을 마치고 돌아간 다음 김정일은 중앙당 책임일군들을 모아놓고 ‘최근 남조선에서 정상들이 오가고 비전향 장기수들이 귀환하고 이산가족상봉이 진행된다고 해서 많은 간부들과 당원들, 근로자들이 정치적 각성과 계급적 의식이 흐려지고 있는데 사상교양사업을 더욱 강화하여야 한다’고 다그쳤다.

또 ‘계급적 원수들의 착취적 본성은 승냥이가 양으로 될 수 없듯이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높은 정치적 신념을 간직하고 원수들과는 웃으며 백번을 입 맞추다가도 언젠가 한번은 뒷덜미를 물어뜯어서라도 미제와 남조선 괴뢰들을 쳐부수고 조국을 통일하여야 한다’ 고 하면서 지금 남조선과의 평화공존은 일시적이라고 노골적으로 말하였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제국주의자들의 봉쇄정책 때문에 고난을 겪고 있지만 우리 대(代)에는 잘 살 생각을 하지 말고 후대들에게 통일된 조국, 부강한 조국을 넘겨주기 위해서라도 핵무기를 비롯한 현대적 무장장비 연구와 개발 사업을 절대로 약화시키지 말고 강화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북한은 또 남한과 각국의 북한 지원에 대해서도 김정일이 백전백승의 담력을 지닌 탁월한 세계적 지도자이기 때문에 남조선 정상들과 러시아의 푸틴, 2002년 5월 박근혜 당시 의원이 평양에 찾아와서 가르치심을 받고 돌아갔다며 김정일의 위대성을 선전하는 자료로 이용하곤 했다. 식량을 비롯한 지원물자도 주민들에게 공급하지 않고 김정일의 이름으로 간부들과 군인들, 군수공장들, 평양시민들에게만 주면서 선전활동만 해왔다.

이렇게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들이 지원해 준 식량과 일체의 지원물자는 김정일 정권 유지와 세습에만 도움을 주었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에 기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북한의 핵무기와 군사장비 개발에 기여했다.

그러다가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자 그동안 은밀히 서해 해상 사건의 보복으로 준비하였던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을 감행했다. 또 남한과의 모든 교류와 협상을 진행하던 통전부 부부장 최승철과 내각 책임참사이던 전금철을 비롯한 11명을 남조선 정보기관의 돈을 받아먹은 배신자라고 하면서 총살하고 온 가족은 정치범관리소로 보내는 비열한 만행을 감행하면서 남한과의 모든 연계를 단절하였다.

이처럼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기 북한에 맹목적인 지원을 하지 않았다면 김정은 3대 세습은 결코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