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22.01.02 05:00
업데이트 2022.01.02 09:43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 사막. 갑자기 거대한 불꽃이 일더니 버섯구름이 세상을 덮었다. 미국이 ‘개짓(gadget)’이란 암호명의 핵폭탄을 처음 터뜨린 뒤 벌어진 일이었다.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 사막에서 벌어진 인류 최초의 핵실험 '트리니티'. 폭발 후 버섯구름이 일고 있다. 이 핵실험은 비밀리에 진행됐다. 미 에너지부
미국의 비밀 핵 개발 프로그램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최초의 핵실험 ‘트리니티(trinity)’를 지켜본 뒤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그리고 이 ‘절대무기’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수많은 인명을 앗았다. 핵폭탄 2발로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그러나, 또 다른 핵전쟁에 대한 공포는 이어졌다.
이후 핵에 대한 논의는 두 축으로 이뤄졌다. 핵무기의 절대적인 파괴력 때문에 전쟁을 억제한다는 핵 억제론이 한 축이다. 반면 오인과 실수로 핵전쟁이 일어나면 인류가 멸망할 수 있다는 반핵주의가 또 다른 축이다.
그런데 핵 논의의 장이 국제정치학에서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에서도 열렸다. 현대미술도 핵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학부 때 미술을 전공한 조비연 한국국방연구원(KIDA) 선임연구원으로부터 핵과 현대미술 관계를 들어봤다. 그는 ‘핵 시대의 현대미술’이란 동영상을 만들어 공개했다.
살바도르 달리와 헨리 무어도 핵을 주제로 삼아
축 늘어진 시계의 초현실적인 그림으로 유명한 살바도르 달리는 47년 ‘비키니의 세 스핑크스’란 작품을 내놨다.
살바도르 달리의 '비키니의 세 스핑크스'(1947년). 달리는 핵 폭발을 너무 아름답게 표현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 일본 모로하시 현대미술관
비키니는 태평양의 환초다. 미국은 46년 7월 1일 이곳에서 벌인 핵실험을 사상 최초로 공개했다. 세상은 핵폭발의 위력을 영상으로 똑똑이 지켜봤다.
스페인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1917~88). Philippe Halsman
비키니 핵실험의 충격이 컸기 때문인지, 그 무렵 프랑스에서 나온 혁신적인 여성 수영복 스타일을 비키니라 부르게 됐다. 이후 58년까지 핵실험을 비키니에서 23번이나 했다.
프랑스 디자이너인 루이 레아르가 1946년 자신이 처음으로 만든 비키니를 입한 마네킹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달리 역시 충격이었다. ‘비키니의 세 스핑크스’의 배경은 사막이다. 첫 핵실험 장소인 알라모고도를 상징했다.
그런데, 그림 속 스핑크스는 이집트와 달리 사람의 머리 모양이다. 또, 머리카락은 버섯구름과 닮았다. 달리가 영상에서 본 비키니 핵폭발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달리는 이 작품으로 비판을 받았다. 핵무기를 너무 아름답게 표현하였다는 이유에서라고 한다.
달리처럼 핵 시대가 열린 뒤 예술가들은 핵에 대해 무조건 비판적이지 않았다.
헝가리 출신 나즐로 모홀리-나기의 ‘핵Ⅱ'(1946년) artplushistory.com
헝가리 출신의 나즐로 모홀리-나기는 46년 ‘핵Ⅱ’에서 수수께끼의 핵 방울을 그렸다. 그 안에 히로시마ㆍ나가사키의 핵폭발이 보인다. 핵전쟁의 위협을 상징하지만, 아주 날카롭진 않다는 평가다.
미국 시카고대학 캠퍼스 안에 있는 조형물인 ‘핵에너지’ 영국 조각가 헨리 S. 무어 헨리의 작품이다. 핵폭탄의 버섯구름과 죽은 사람의 해골과 비슷한 모양이다.
헨리 무어의 '원자력 에너지'(1966년). 인류 최초의 핵융합의 기념비다. 미 시카고 대학
조형물이 세워진 곳은 원래 실험실 자리였다. 42년 인류 최초의 핵 연쇄반응(분열)을 이뤄낸 실험실이었다.
영국의 조각가 헨리 S. 무어(1898~1986).
그런데, 핵분열은 핵폭발의 기본이다. 핵분열을 해냈기에 핵폭탄을 만들 수 있었다. 무어는 이에 대한 기념비를 만든 것이었다.
운명의 시계는 자정에 다가가지만, 핵 공포를 잊은 한국
핵 시대를 적극적으로 찬양한 예술가도 있었다.
'핵 예술'을 개척한 미국의 앨리스 시몬. 그는 방사선 실험실에 화실을 차렸다. Tree of Life
미국의 여성 화가ㆍ조각가인 앨리스 시몬은 '핵 미술'을 개척했다. 그는 실험실에서 다양한 물체에 방사선을 쬐었다. 그러면, 현실에서 보기 힘든 무늬가 나온다. 이를 작품으로 만들었다.
앨리스 시몬의 핵 미술 대표작 '생명수'(1971년). 아크릴에 방사선을 쬐어 만들었다. Tree of Life
그러나, 시몬도 86년 소련 체로노빌 원전 사고 후 핵 미술을 그만뒀다고 한다.
피터 페리의 '세계의 인류'(1960년). Art UK
피터 페리는 ‘아톰 보이’와 ‘세계의 인류’에서 핵 개발로 비상하는 인류를 표현했다.
마루키 부부의 '불 II'(1950년). Maruki Gallery for the Hiroshima Panels
반면, 반핵주의를 분명히 한 예술가들도 있었다. 일본의 마루키 이리ㆍ토시 부부는 50년 ‘불Ⅱ(Fire Ⅱ)’이란 그림에서 히로시마의 참상을 나타냈다.
콜린 셀프의 '해변의 소녀'(1966년). Imperial War Museum
콜린 셀프는 핵무기의 잔혹성을 표현한 조각가로 유명하다. 그의 ‘해변의 소녀’나 ‘원폭 피해자’는 히로시마ㆍ나가사키 피해자를 표현했다.
이들 작품은 실물 크기의 마네킹에 재와 검은색 페인트를 칠했다. 핵폭발로 팔다리를 잃은 피해자를 묘사하기 위해서다.
조비연 연구원은 “현실과 국제정치뿐만 아니라 현대예술에서도 핵무기의 절대성과 비핵ㆍ반핵이라는 상반된 가치가 복잡하게 얽혀있다”고 말했다.
트레버 패글렌의 '트리니티 큐브'(2011년).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지역에서 가져온 유리창 조각들과 트리니타이트란 물질을 녹여 만든 작품이다. ArtReview
이 같은 핵을 소재와 주제로 한 현대미술 작품은 1991년 소련의 붕괴로 냉전이 끝난 뒤엔 찾기 힘들게 됐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원전 사고가 일어난 뒤 반원전을 다룬 트레버 패글렌의 ‘트리니티 큐브’와 힐다 헬스트롬의 ‘자연재해의 물질성’ 등이 나왔다.
힐다 헬스트롬의 '자연재해의 물질성'(2012년). 후쿠시마 원전 주변의 금지 구역 거주자였던 마쓰무라 나오토와 함께 판 땅으로 만든 작품이다. Cfile
하지만, 냉전의 종식으론 핵전쟁의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미국ㆍ러시아ㆍ중국ㆍ영국ㆍ프랑스 등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5개 나라만 손에 쥐던 핵무기가 다른 나라로 퍼져가면서다. 인도ㆍ파키스탄ㆍ북한은 핵 보유를 밝혔고, 이스라엘은 핵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미국 예일대 교수인 폴 브래큰은 『제2차 핵시대』에서 오히려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더 키웠다고 분석했다.
더군다나 유럽에서 미국과 러시아가, 아시아ㆍ태평양에서 미국과 중국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핵무기를 개발한 인도와 파키스탄은 앙숙이다.
2020년 현재 ‘운명의 날 시계’는 자정(인류 종말)까지 100초가 남았다는 걸 보여준다. 2018년 북핵 때문에 2분 30초에서 2분으로 30초 당겨졌는데, 2020년 코로나19와 미국ㆍ이란 핵 갈등 때문에 20초 더 앞서게 됐다. AFP=연합
이 때문에 ‘운명의 날 시계’는 자정(지구 종말)로부터 91년 17분에서, 2018년 2분, 2020년 100초로 점점 당겨졌다. 100초는 지금까지 자정에 가장 가까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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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을 머리에 이고 사는 형국의 한국은 핵전쟁이 남 얘기가 아니다. 북한은 본격적인 핵 협상에 나서지 않으면서 핵 능력을 고도화해 실전배치하고 있다. 그런데도, 대부분은 북핵을 미국과 북한의 일로만 여기는 분위기다.
북한의 핵 위협이 현실로 다가오는데 한국의 세태는 이에 둔감한 게 현실이다. 냉전 땐 예술가마저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핵의 공포를 작품으로 승화할 정도로 화두였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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