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태평로] 누가 어른스러운가

Shawn Chase 2021. 4. 5. 23:08

日, 열차 팸플릿에 ‘동해’ 표기… 한국학교 ‘동해’ 교가 방송도
반대라면 우리는 용납하겠나… 정부는 엄격하게 민간은 관용을

이한수 여론독자부장

입력 2021.04.05 03:00 | 수정 2021.04.05 03:00

 

서랍 속에 넣어뒀던 팸플릿을 꺼내 봤다. 일본 혼슈 북서부 아오모리~아키타 해안을 따라 달리는 열차 고노센(五能線)을 홍보하는 전단이다. 몇 해 전 취재하러 갔다가 열차에 놓인 한국어판 팸플릿을 가져왔다. 단지 수집 취미 때문이 아니다. 팸플릿 내용을 보고 깜짝 놀랐기 때문이다.

‘동해와 세계자연유산 시라카미 산지를 바라보면서 달리는 고노선 철도 여행’. 여덟 쪽 팸플릿은 표지에 한글로 ‘동해’라고 적었다. 페이지를 넘기자 2쪽에는 ‘고노선의 매력은 시라카미 산지와 동해의 대 파노라마입니다’라고 썼다. 바닷가 철로를 달리는 열차 사진을 함께 실었다. 한국인을 위해 한글로 적은 팸플릿이라지만 일본철도(JR)가 발행한 홍보지에 자국 서쪽 바다를 ‘동해’라고 표기한 점에 놀랐다. 한국인 여행객을 유치하려는 노력인 동시에 깊은 배려라고 느꼈다.

일본 혼슈 북서부 해안 열차 '고노선'의 한글 팸플릿. 영문으로는 'the Sea of Japan'이라고 썼지만 한글로는 '동해'라고 표기했다. 2015년 발행.

만일 우리가 정동진 해안 열차에 비치한 일본어 팸플릿에 ‘일본해와 설악산 산지를 바라보면서 달리는 철도 여행’이라고 썼다면 어떤 결과를 빚었을까. 관련 책임자는 줄줄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인터넷에는 온갖 비난과 욕설이 난무했을 것이다. 관광객 유치를 위한 노력이며 일본인 여행객을 배려한 것이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해묵은 기억을 다시 떠올린 까닭은 최근 일본 고교 야구 고시엔에 처음 진출한 한국계 학교 교토국제고 소식 때문이다. 지난달 24일 교토국제고의 한국어 교가가 고시엔 전통에 따라 그라운드에 울려 퍼졌다. ‘동해 바다 건너서 야마토(大和·일본)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로 이어지는 우리말 교가를 재학생과 졸업생이 함께 부르는 모습이 NHK방송을 통해 생중계됐다. 아사히신문은 이튿날 기사에 ‘고시엔에 울려 퍼진 한국어 교가’라는 제목을 달고 “한국이냐 일본이냐가 아니라 국경을 넘어 야구의 감동을 전하기 바란다”는 졸업생 이야기를 전했다.

 

24일 일본 효고(兵庫)현 한신(阪神) 고시엔(甲子園) 구장에서 열린 제93회 일본 선발고교야구대회(봄 고시엔) 첫 시합 32강전에서 교토국제고가 10회전 연장 승부 끝에 시바타고를 5-4로 이긴 뒤 한국어 교가를 듣고 있다. 이 학교 교가는 '동해 바다 건너서 야마토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 아침저녁 몸과 덕 닦는 우리의 정다운 보금자리 한국의 학원'이라는 내용이다. 2021.3.24 마이니치 신문 제공

반대 상황이라면 어땠을까. ‘일본해 건너서 한반도 땅은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 운운하는 일본계 학교 교가가 잠실 야구장에 울려 퍼진다면 우리 사회는 이를 용인할 수 있을까. ‘잠실에 울려 퍼진 일본어 교가’라는 제목으로 “국경을 넘어 야구의 감동” 같은 기사를 쓸 수 있었을까. 우리 사회도 성숙해지고 있다. 상대를 보고 자신을 돌아본다. 교토국제고 관련 기사엔 ‘한국에서 저런 일본 교가를 부른다면 난리 날 듯’ ‘만약 반대였으면 우리는 그런 관용이 있을까?’ 같은 댓글이 여럿 보였다.

그러나 일본의 용인은 거기까지다. 정부 차원에선 ‘동해’라는 표현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최근 미국 인도·태평양사령부가 북한의 미사일 발사 관련 성명에서 발사 방향을 ‘동해’라고 밝히자 일본 정부는 즉각 정정을 요청했다. 미국 측은 곧바로 요구를 받아들였다. 일본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교류하는 민간 영역에선 상대를 배려해 ‘동해’라고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정부와 국제사회라는 공적 영역에선 ‘동해’ 표현을 결코 수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반대다. 폭 넓은 관용이 있어야 할 민간 영역에서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 그들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나라를 팔아먹은 것처럼 달려들어 뭇매를 때린다. 반면 원칙과 규율을 확고히 지켜야 할 정부와 국제사회라는 공적 영역에선 대충 넘어간다. 우리 정부가 미국 측에 강력히 요청해 바다 이름을 다시 ‘동해’로 바로잡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없다. 국력 차이가 있어 어쩔 수 없다는 건 핑계일 뿐이다. 절실하지 않고 관철하겠다는 의지가 없는 것이다. ‘동해’는 그저 분노를 자극하는 국내용 소재이기 때문이다. 정치에는 ‘귀신’이고 외교에는 ‘등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