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이슈

좋은 학교, 나쁜 학교, 이상한 학교… 우후죽순 혁신학교

Shawn Chase 2019. 11. 3. 15:45


조선일보 


입력 2019.11.02 03:00

[아무튼, 주말]
전국 1714곳 혁신학교 10년

전국 1714곳 혁신학교 10년
그래픽=김의균
"학생들은 일베 회원이다."

"선생님들은 정치 교사잖아요."

지난달 서울 관악구 인헌고등학교에서 벌어진 교사와 학생 간의 설전이다. 학생들은 지난달 23일 "교사들에게 편향된 정치사상을 강요받았다"며 "우리를 정치적 노리개로 이용하지 말라"는 기자회견을 학교 정문에서 열었다. 교사들은 교내 방송을 통해 "가짜 뉴스에 속지 마라"며 학생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했다. 정치권에서나 볼 법한 모습이었다. 인헌고는 2012년 혁신학교로 지정됐다. 이전까지 학생 주도형 학습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꼽히고 있었다.

초·중·고 혁신학교는 경직된 교육과정에서 벗어나 학생들에게 다양한 체험을 시켜주자는 취지로 시작됐다. 당시 13개교였지만, 지금은 전국에 1714개교. 전국 학교 100곳 중 17곳꼴이다. 혁신학교에 대한 이야기는 다양하다. '전교조 교사들이 몰린다' '성적이 낮아진다'부터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발표 수업에 두각을 드러낸다' 등이다.

혁신학교를 여러 차례 경험했다는 교사들의 말을 종합해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에 비유하면 이렇다. "좋은 혁신학교는 서로 닮았지만, 나쁜 혁신학교는 제각각의 이유로 나쁘다." '아무튼, 주말'이 혁신학교의 10년을 돌아봤다.

잘되는 혁신학교란

전국 1714곳 혁신학교 10년
지난해 11월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송파 헬리오시티 입주 학부모들이 혁신학교 반대 집회를 열고 있다. / 조선일보 DB
지난 29일 서울 노원구의 한 초등학교 5학년 교실, 학생 4명이 마주 볼 수 있게 앉아 있었다. 학기 내내 계속 유지하는 모둠 대형이다. 칠판을 향해 앉아 선생님의 이야기만 듣지 않고, 학생끼리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다. 이날 영어 수업은 애니메이션을 보며 진행됐다. "여기서 주인공이 '슈어(sure)'라고 했죠. 꼭 이런 표현을 써야 할까요?" '예스(yes)는 어때?' '그건 너무 차갑게 느껴지나 봐' 수업 구성은 담임교사 이상준(37·가명)씨가 맡았다. "저희 어릴 때는 '아임 파인 생큐, 앤드 유?' 같은 표현을 무조건 외웠잖아요. 어른이 되니까 아무도 그런 말을 안 쓴다면서 비웃어요. 아이들은 영어라는 언어를 이해하길 바라요."

혁신학교는 2009년 김상곤 당시 경기도교육감이 처음 도입했다. 다음 해 지방선거에서 혁신학교 공약을 내건 시도 교육감이 6명 당선됐고, 본격적으로 개수를 늘려 갔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전국적으로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지금은 전국 모든 시도에서 혁신학교를 운영 중이다.

잘되는 혁신학교는 교원·학생·학부모의 의견을 지정 초기 단계부터 십분 반영해 교육 내용, 운영 방식 등을 정한다. 올해 혁신학교로 지정된 경기도의 한 중학교는 체험 학습과 더불어 지필(紙筆) 고사도 함께 실시한다. "고등학교에 가서 종이 시험에 적응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학부모의 걱정을 반영한 결과다. 이 학교 교사는 "단답식 시험을 보되 비중은 작게 두고 있다"며 "혁신학교는 학부모, 학생의 의견을 반드시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예산 타내기로 악용

전국 1714곳 혁신학교 10년
혁신학교의 최대 장점은 수업을 유연하게 운영할 수 있다는 점이다. "혁신학교가 1000곳이라면, 1000가지 교육과정이 있을 것"이라는 게 교사들의 말이다. 그러나 형태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혁신학교 운영이 잘 이뤄지지 않아도 알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반 학교가 혁신학교 자격을 받기 위해서는 시도 교육청의 허가가 필요하다. 교육과정에 대한 심사는 엄격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서류 심사와 현장 평가를 거친다. '학교 문화 발전을 위한 노력' '교육 공동체의 비전 실현을 위한 교육과정 운영' 등이 평가 기준이다. 정량적 평가는 이뤄지지 않는다. 대신 대부분 지역이 학부모, 교원 과반이 동의해야 한다는 조건을 둔다. 동의만 이끌어내면 혁신학교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한번 지정되면 재지정은 더 쉽다. 전희경 자유한국당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 5년간 혁신학교 1085곳 중 재지정 평가에 탈락한 학교는 25곳에 불과했다. 올해 신청한 학교 285곳은 전부 통과했다.

일부 학교는 이 점을 악용해 추가 예산만을 받고, 교육 과정은 고치지 않는다. 혁신학교로 한번 지정되면 3년에서 5년간 매년 약 5000만원의 예산을 추가로 받을 수 있다. 서울의 한 학교는 지난해 혁신학교 예산의 약 80%를 놀이터, 강당 등 학교 시설에 투자했다고 한다. 이 학교 교사는 "예산은 다른 곳에 다 썼으면서, 성과를 학급마다 제출하라고 해서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느라 진땀을 뺐다"고 했다.

혁신학교 개수를 늘리라는 정부 방침에 따라 보여주기식 혁신학교를 시행하는 시도 교육청도 있다. 익명을 요청한 교육청 관계자는 "우리 지역의 혁신학교는 학생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 낸다는 '서울형 혁신학교'와는 분명히 다르다"며 "이름만 혁신학교라고 했을 뿐"이라고 했다.

10년 묵은 고질병들

초기 혁신학교는 '전교조 학교'라는 소문이 많았다. 혁신학교는 교사의 자발적 지원이 가능한데, 실제 자원한 상당수가 전교조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경기도에서 근무한 지 15년이 되는 영어 교사는 "다른 곳에서는 비주류였는데, 여기(혁신학교)에서는 주류라고 고백한 전교조 출신 동료가 있었다"며 "인헌고도 비슷한 사례일 듯"이라고 했다. 학교 축제 수익금을 쌍용차 노조에 기부하거나, 전교조 소속 교사를 교장으로 추대하기 위해 투표 결과를 조작한다는 과거 잡음은 대부분 혁신학교에서 나왔다.

성 평등 교육에 지나치게 집중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교과과정을 재량으로 구성할 수 있어, 교과와 상관없는 수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혁신학교인 경기도 중학교의 지난해 첫 국어 수업 시간, 교사의 첫마디는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교사는 "남성은 동일 직종에서 여자보다 30% 정도 더 많은 임금을 받는다"며 "고용주에게 그 이유를 묻는 작문을 써보자"고 했다. 수업은 교과서 내 성차별 요소를 잡아내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수업을 들었던 학생은 "성 평등의 중요성은 알지만, 국어 과목에서 학기 첫 수업으로 할 정도인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학업 능력에 대한 학부모의 우려도 크다. 시험을 거의 보지 않는 혁신학교에서는 자녀의 수준을 알 수 없다. 매년 시행되는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에서 기초학력에 미달하는 혁신학교 고교생은 2016년부터 전국 평균보다 2배 이상 높게 나타난다. 지난 7월 서울 강서구 마곡 제2중학교(가칭)가 혁신학교로 지정된다는 소문이 돌자, 예비 학부모 50여명은 "마곡2중이 기초학력이 보장되는 일반 학교로 개교하길 바란다"며 서울시교육청 앞 등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에 참석한 예비 학부모 이모(42)씨는 "성적을 떠나, 아이가 보통 학교에서 기본적인 지식은 갖췄으면 좋겠다"고 했다.

혁신학교는 학교 재량에 따라 성과가 확연히 갈린다. 이런 양극화를 보완할 방법을 전문가들에게 자문했지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김영식 좋은교사운동 대표는 "혁신학교는 교장 교사를 비롯한 교원들의 의지가 있을 때 효과적으로 운영된다. 현행상 의욕 없는 교사들을 강제할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하다"고 했다. 서울시교육청은 시내 213곳인 혁신학교를 2022년까지 250곳으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1/01/201911010161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