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후지쯔 집행역 "한일갈등 물밑엔 일본인의 박탈감 있다"

Shawn Chase 2019. 8. 4. 18:08
류현정 기자

입력 2019.08.04 06:01 수정 2019.08.04 09:18
일본이 화이트 리스트에서 한국을 배제하고 한국에선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이 일고 있다. ‘강(強) 대 강’으로 맞붙은 한·일 갈등이 경제 전면전으로 치닫고 있다. 디지털 편집국은 한·일 경제에 정통한 인사를 중심으로 갈등 상황의 원인을 진단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연속 인터뷰 시리즈를 싣는다. [편집자 주] 

"허, 참, 이게 하루아침에 해결책이 ‘뚝딱’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원인이 쌓여 온 만큼 오랜 세월이 걸려 해결될 것입니다. "

7월 30일 만난 안경수 전 후지쯔 경영집행역(현 네오랩컨버전스 회장)은 갈수록 첨예해지는 한·일 갈등의 출구는 어디 있냐고 묻는 기자에게 고개를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

안 회장은 일본 최고의 컴퓨터 회사 후지쯔에서 10여 년간 근무하며 6년 동안 본사 중역까지 맡았다. 그는 후지쯔 70년 역사상 본사 임원에 오른 첫 외국인이었다. 이후 소니 본사 집행역 겸 소니코리아 회장까지 맡았으니, 일본 비즈니스맨의 혼네(本心·본심)를 그만큼 잘 읽는 사람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대우, 삼성, 효성 등 국내 대기업의 30대 임원으로 뛰었고, 지금은 서울 구로디지털단지에 위치한 직원 100명 규모의 IT기업 네오랩컨버전스의 회장으로 젊은이들과 부대끼고 있다. 

그는 "일본 톱 5 회사에서 날마다 매출을 챙겼던 중역의 촉과 경험으로 이야기한다"고 했다. 

"저는 일본 아베 총리의 정치적 속셈만으로 이 상황까지 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단세포적으로 문제를 진단하는 거예요. 갈등의 물밑에는 일본인의 박탈감이 있어요. 바로 ‘잃어버린 20년’이죠. 한국이 여기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줬고 혜택도 얻었어요. 일본은 (우리나라에 대해) 장기적으로 또한 경제적으로 호의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정치가 갈등을 표면화시켰지만, 정치적 타협만으로 갈등을 해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는 감정과 분노만 앞세울 것이 아니라 갈등의 원인도 냉정하게 진단해봐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뼈아픈 질문을 던졌다. 

"우리나라에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중소·중견 기업이 많이 탄생해야 이 파국(破局)을 넘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술직마저도 귀하고 천함을 가르는 한국 문화에서 부품·소재 글로벌 챔피언이 나올 수 있을까요?"

다음은 안 회장과의 일문일답.

― 우리나라에 도입된 컴퓨터 1호는 후지쯔 ‘파콤 222’였다. 한국에선 누구도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내가 후지쯔로 1996년 자리를 옮겼을 때 당시 87년생 아들이 일본 기업으로 갔다며 굉장히 싫어했다. 내가 ‘한국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을 배우고 이용하는 것’이라고 아들을 달랬다. 스스로도 한국 기업과 부딪히는 사업을 맡지 않는다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세웠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근대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다. 만약 일제 36년이 아주 오래 전, 가령 원나라의 고려 침공 이전에 일어난 일이었다면, 한국인의 반일(反日) 감정이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이번 갈등의 주된 원인 중 하나로 보는 이유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승승장구하던 일본 전자산업의 독주에 제동이 걸린 탓도 있다. 원래 가전 부문에선 RCA, 제니스, GE 같은 미국 기업들이 이름을 날렸다. 그러다가 파나소닉, 도시바, 샤프 같은 일본 기업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지금은 삼성, LG가 수위를 달린다. 누구도 제 것이 남의 손에 넘어가는 데 박수만 보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일본은 이 빼앗긴 먹거리의 보충재를 찾지 못했다. 이건 아주 단순한 플러스, 마이너스 게임이다. 더하는 건 없는 데 빼앗기는 것만 있다면? 되찾고 싶어하지 않겠는가. 우연한 기회에 일본으로서는 그 기회를 발견한 거다."

― 일본은 왜 다음 먹거리를 찾지 못했나.

"일본은 70-80년대에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으로 미국과 독일 등을 따라잡았다. 자신감이 붙은 일본은 ‘퍼스트 무버(first mover·창의적 선도자)’ 전략을 가동했다. 일본은 미국 기업과 부동산을 사들였다. 

일본도 중고등학교 시절 선생한테 혼나며 공부하고, 도쿄대를 나와야 도쿄대의 교수가 되는 폐쇄적인 문화를 갖고 있다. 혁신과 창의를 꽃피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본의 퍼스트 무버 전략은 통하지 않았고 후발 도전자에게 있던 것마저 빼앗기기 시작했다. 이는 우리에게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된다. 우리도 새 활로는 개척하지 못한 채 중국한테 따라 잡힐 수 있다. 잘 하는 것을 우선 잘 지켜야 한다."

― 일본의 대표 기업인 소니는 최근 부활하지 않았나. 

"나는 소니가 부활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자 폭을 조금 줄이고 이익 폭을 늘었다고 부활한 게 아니다. 오랫동안 조직 생활을 해보니, 조직은 역시 ‘혼(魂)’이 있어야 한다. 혼은 ‘폼 나는 비전’ 그 이상이다. 조직원들이 열정을 쏟아붓게 만드는 힘이다. 

소니에는 아직 혼을 바탕으로 한 비즈니스 경쟁력이 보이지 않는다. 소니는 영국계 미국인인 하워드 스트링거, 미국 유학파 출신인 히라이 가즈오를 잇따라 CEO로 발탁하면서 미국 기업도 아니고 일본 기업도 아닌 기업이 되었다. 나는 두 사람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지만, 소니의 혼을 부활시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한국은 교역 중심 경제 구조를 갖고 있다. 중국엔 물건을 수출하고 일본으로부터는 물건을 수입해야 하는데, 중국과 일본이 각각 사드와 대법원 판결로 한국을 흔들고 있다. 

"한·일 갈등 해법? 오늘 당장 해법을 내놓는 것은 무리다. 단기간에 생긴 갈등이 아니기 때문이다. 금방 풀릴 문제도 아니고 완전히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지정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지고 가야 할 업보(業報)다. 영국, 프랑스, 독일이 100년 넘게 갈등하고 있지 않나. 

오랜 세월을 갖고 풀어야 할 문제라면, 불매 운동이나 죽창가 등 감정으로 대응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표현이 좀 어색하기는 한데, 어떻게 하면 잘 싸우지 않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 정부가 핵심 소재·부품·장비 기술개발에 매년 1조원 이상 지원하기로 하는 등 이 분야 경쟁력 강화에 나섰다.

"역대 정부에서 계속 중소기업 육성을 강조해왔다. 하지만, 제대로 성과를 낸 적은 없다. 물고기 잡는 법을 배우게 하는 게 아니었고 물고기를 아예 갖다 주는데 급급했기 때문이다. 사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고 먹을 것을 갖다 주면, 자식은 굶어 죽는다는 말이 있다."

― 박영선 중소벤처부 장관이 ‘중소기업이 불화수소를 생산할 수 있지만, 대기업이 이를 구매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나는 우리나라 중소기업이 ‘삼성, LG에 납품한다’는 폐쇄적이고 종속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어 전 세계 누구한테라도 팔 생각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 한국에서 부품·소재 분야 세계 챔피언이 나오게 하려면? 

"한국의 뿌리 깊은 사농공상(士農工商) 문화가 문제다. 도처에 자리잡은 ‘교수 만능주의’가 이를 잘 보여준다. 선거 캠프에 교수 500명씩 줄을 서고 실제 국정 리더로 교수를 발탁한다. 교수는 주로 혼자서 일하고 학생들이 자신을 무조건 따르는 분위기에서 살아온 사람 아닌가. 그들은 팀으로 생존한다는 게 뭔지 모른다. 현장을 모르는 리더가 나라를 망친다. 

사농공상 문화가 기술직에도 계급을 만든다. 우리나라는 자동차 트랜스미션을 만드는 기술자보다 반도체 설계 기술자가 더 훌륭한 것처럼 대우한다. 타이어 만드는 사람보다 엔진 설계하는 사람을 더 쳐준다. 심지어 오너 2세도 선대(先代)가 기름밥을 먹으며 일구어 놓은 가업을 두고 폼이 안난다며 벤처 투자에 기웃거린다. 

관계에도 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기술에도 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 일부 기술 분야를 제외하고 고객과 기술의 축적이 잘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차제에 우리 사회 풍토를 돌아보자. 냉엄하게 자문해야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부품·소재 글로벌 챔피언이 나올까."

― 한국과 일본의 다른 점은 뭔가.

"한국 기업의 장점은 집행력(실천력)이다. 특히 삼성이 보여준 경영력은 완벽에 가깝다. 한국은 인사, 영업, 기술 등을 두루 돌게 하고 인재를 최고의 경영자로 키운다. 일본에서는 기술자는 평생 기술자로, 영업자는 평생 영업자로 자란다. 한 부문만을 알고 최고경영자에 오르기에 한국기업에 비해 경영력이 떨어진다. 

하지만, 일본에선 산의 기슭 역할을 맡은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분야에서 묵묵하게 일하며 세계 최고가 된다. 후지산은 아래가 넓다. 그게 일본이다. 한국인은 누구나 위에 오르려고 한다. 폭이 좁고 뾰족한 63빌딩을 닮았다. 이게 사농공상 문화와 관계 있다. 부품·소재 육성이 구호로만 되는 게 아니다.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 장기적으로 문제를 풀라고 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해야 할 일은 있을 것이다. 

"현실을 아프도록 냉정하게 보자. 엉터리 통계는 그만 인용하자. 내가 한국IT 산업의 매출은 절반으로 깎아서 보는 게 정확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보자. 후지쯔가 삼성전자에 100억원어치 대형 컴퓨터를 바로 납품할 수 있었다면, 총매출은 100억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IT 자회사를 만들어 이를 통해 납품하게 한다. 즉, 후지쯔 에서 삼성SDS(매출 100억원), 삼성SDS에서 삼성전자(매출 110억원)으로 총 210억원의 매출이 잡히는 식이다. 

지금도 한국 경제 통계 중 이와같은 착시 효과가 수없이 많다. 누가 한국을 부품 수출 강국이라고 하던데 헛웃음이 나왔다. 한국 기업이 해외에서 부품을 수입해 해외 자사 공장에 공급하는 일종의 자전 거래까지 부품 수출 통계에 잡히는 데, 이 행간을 읽지 않고 주장한 것이다. 

일본은 가미카제 특공대를 운영했던 나라다. ‘일부의 희생으로 상대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다면 애국하는 길’이라는 전 근대적 가치가 일본에 남아 있을지 모른다. 우리 산업이 희생물이 되어서는 안되기에, 냉정하게 현실을 판단하고 대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