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가전

‘AP 세계 최강’ 퀄컴에 도전하는 삼성

Shawn Chase 2019. 2. 25. 17:59

“퀄컴보다 먼저 자동차 AP시장 개척”

288호 2019년 02월 25일



“저거, 저거 잘해야 하는데….”

1월 30일 경기도 화성 사업장을 돌아보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다소 긴장된 목소리로 오른손 검지를 치켜든 채 한쪽을 가리켰다.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를 비롯한 여당 국회의원 10여 명을 화성 사업장에 초대한 날이었다.

이 부회장이 가리킨 곳은 차량용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가 전시돼 있는 곳이었다. 한 국회의원이 “삼성이 (이 분야 반도체에서) 5년 정도 앞서 있는 거죠?”라고 농담조로 묻자 이 부회장은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며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

AP는 비메모리 반도체 중 하나다. 비메모리 반도체는 데이터를 저장하는 기능의 메모리 반도체(D램·낸드플래시)를 제외한 데이터를 연산·처리하는 반도체다. AP는 스마트폰 등 모바일 기기에서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CPU) 기능을 하는데, 최근에는 자율주행차 등 스마트폰 이외의 제품에도 쓰이고 있다.

이 부회장이 AP를 바라보며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것은 AP가 앞으로 삼성전자의 전체 사업 방향을 좌우할 수 있는 반도체이기 때문이다. AP가 지금까지는 스마트폰·태블릿PC 등 일부 IT 기기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되는 반도체 칩이었지만, 사물인터넷(IoT·사물과 사물을 무선인터넷으로 연결해서 통제하는 시스템) 시대가 오면 청소기부터 의류, 신발에까지 수요가 확장될 수 있다. 또 AP와 연계된 가전제품이나 IT 기기들을 더 비싸게 더 많이 판매할 길도 열린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는 AP 제조 능력을 강화해 전 사업 영역에서 새로운 시장을 열려고 준비하고 있다.

‘이코노미조선’이 만난 10여 명의 반도체 전문가들은 “삼성전자가 수십 년간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했던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확대해 나갈 핵심 열쇠는 AP가 될 것”이라며 “삼성전자는 이미 AP를 중심으로 한 비메모리 반도체 강화 전략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삼성전자 앞에 놓인 AP 시장 상황은 녹록지 않다. 시장조사 업체 스트래티지애널리틱스(SA)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AP 시장에서 세계 3위의 점유율(14%·2018년 1분기)을 유지하고 있다. 2위 애플(17%)과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점유율 45%의 절대 강자 퀄컴과는 아직 견줄 수 없다. 삼성전자가 비메모리 1등을 목표로 삼고 있다면, 퀄컴의 아성을 반드시 무너뜨려야 한다.


2018년 12월 6일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딜라이트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이 반도체 관련 전시물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2018년 12월 6일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딜라이트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이 반도체 관련 전시물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고질적 약점 GPU 강화 나설 듯

전문가들은 삼성전자가 AP 시장에서 퀄컴을 깨트리기 위해 크게 두 가지 전략을 취할 것으로 예상한다. 인수·합병(M&A)과 자동차용 AP 시장 진출이다.

우선 삼성전자가 사용할 수 있는 전략 중 하나는 그래픽이나 데이터를 처리하는 역할인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잘 만드는 회사를 M&A하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AP에서 퀄컴보다 못한 핵심 기능 중 하나가 GPU다. 삼성전자는 자체 GPU를 생산하지 못해 외부에서 GPU를 사온다. 과거에는 GPU가 스마트폰으로 게임할 때 등 그래픽이 많이 사용되는 작업에서만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GPU 기능이 데이터를 연산·처리하는 역할까지로 확대되고 있다. 이는 전통적으로 CPU가 맡았던 기능인데 연구자들이 GPU로 CPU의 연산처리를 보완하면 훨씬 더 빠른 데이터 처리가 가능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구글의 인공지능(AI)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바둑으로 이긴 것도 GPU의 엄청난 연산 능력을 이용한 사례다. 점점 데이터가 급증하는 환경이 오고 있는데 GPU 부문에서 밀려서는 AP 시장에서 퀄컴을 이길 승산이 없다.

GPU는 처음부터 연구·개발(R&D)을 해 따라가는 데 한계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실제 2016년부터 삼성전자는 내부에 ‘S-GPU’팀을 만들어 자체 개발 프로젝트에 나섰지만 아직 GPU를 상용화하지 못하고 있다. 김범준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오랜 기간 이 분야만 연구한 기업들이 많아 진입 장벽이 높은 영역”이라고 했다. GPU 분야는 미국 엔비디아, 영국 이매지네이션 테크놀로지 등이 강력한 기술력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는 쌓아둔 현금으로 이런 업체들을 M&A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 104조2100억원(2018년 기준)을 내부에 쌓아두고 있어 자금 여력이 있는 데다 퀄컴을 반드시 꺾어야 하는 삼성전자로서는 고성능 GPU를 조달하는 것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한태희 성균관대 반도체시스템공학과 교수는 “이매지네이션 테크놀로지와 같은 회사는 삼성전자가 M&A를 노려볼 만한 기업”이라고 했다.


퀄컴이 주도하는 판을 깨려는 삼성

삼성전자의 또 다른 전략은 퀄컴이 장악한 스마트폰용 AP 시장과는 완전히 다른 시장인 자동차용 AP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다. 이는 퀄컴이 안주해 있는 AP 시장의 판을 깨겠다는 전략이다.

삼성전자가 이런 전략을 쓰는 이유는 압도적인 1위 기업이 이미 ‘사실상의 표준(de facto standard)’으로 자리 잡은 시장에서 경쟁해서는 승산이 없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용 모바일 AP 시장은 퀄컴이 이미 이런 사실상의 표준 지위를 확보했다. 대다수의 스마트폰 제작사가 초기 제품부터 퀄컴의 AP에서 가장 잘 구동되도록 애플리케이션을 설계했고, 이미 이런 시스템이 확고해졌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조차 해외 수출용 자사 스마트폰 모델에 일부 퀄컴의 AP를 넣는 경우가 있다.

삼성전자가 AP 시장의 판도를 바꾸기 위해 눈을 돌린 곳은 자동차용 AP다. 자동차는 지금까지 엔진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기계장치에 불과했다. 하지만 자율주행차가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수많은 첨단 반도체가 필수 부품이 된 전자장치로 진화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런 흐름을 읽고 지난해 10월 자동차용 AP인 ‘엑시노스 오토’를 출시했다. 엑시노스 오토는 차량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이나 디지털 계기판, 헤드업 디스플레이(HUD) 구동용으로 쓰이는 AP다.

엑시노스 오토는 디스플레이 장치 6개를 동시에 제어할 수 있고 카메라는 최대 12개까지 제어할 수 있다. 또 3개의 GPU가 디지털 계기판과 중앙화면표시장치(CID), 헤드업 디스플레이 등의 애플리케이션을 독립적으로 작동시킬 수 있도록 설계됐다.

엑시노스 오토는 벌써 글로벌 자동차 회사의 호응을 얻고 있다. 지난달 삼성전자는 독일의 자동차 회사 아우디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에 ‘엑시노스 오토 V9’을 공급하는 계약을 했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앞으로 자율주행 차량용 AP가 많이 필요해지는데, 고도의 안전성이 요구되고 센서와 카메라 등과 연결돼야 하기 때문에 기존의 스마트폰용 AP로는 대체할 수 없는 시장”이라면서 “이 시장에 삼성전자가 퀄컴보다 먼저 진출한 것”이라고 했다.

삼성전자는 아우디에 공급하는 엑시노스 오토 V9뿐 아니라 첨단 운전자 보조 시스템(ADAS)용 ‘엑시노스 오토 A’와 텔레매틱스 시스템용 ‘엑시노스 오토 T’ 등 특화된 기능의 차량용 AP를 계속 출시할 계획이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자동차는 스마트폰 등 다른 IT 기기보다 훨씬 가격이 비싼 제품이기 때문에, 자동차에 들어가는 반도체의 양도 엄청나고 가격도 비싸다”며 “자동차를 잡으면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잡을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는데, 삼성이 이런 상황을 잘 파악한 것”이라고 했다.


plus point

AP 생태계의 설계자 ARM과 손정의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이 2016년 6월 28일 일본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손 사장 뒤로 소프트뱅크가 인수한 영국의 반도체 설계 회사 ARM의 로고가 보인다. 사진 블룸버그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이 2016년 6월 28일 일본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손 사장 뒤로 소프트뱅크가 인수한 영국의 반도체 설계 회사 ARM의 로고가 보인다. 사진 블룸버그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기업이 영국의 반도체 설계 회사 ARM이다. ARM은 AP에 들어가는 기본 설계도면을 만들어 판매하는 회사다. AP에는 핵심 기능인 데이터 연산을 수행하는 부분이 있다. 이를 ‘코어’라고 부르는데 ARM 설계도면은 코어를 만드는 안내서 역할을 한다. 삼성전자, 애플, 퀄컴, 미디어텍 등 세계 각국의 AP 제조사들은 ARM의 설계도면을 사와 코어를 만든 후 AP별로 특화된 기능에 맞춰 부가기능을 추가해서 완성한다. 전 세계 AP의 90% 이상이 ARM의 설계도면을 적용한 제품이다. ARM이 이렇게 AP 설계도면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초기에 저렴한 가격으로 많은 AP 제조사를 고객으로 확보했기 때문이다. 일단 다수의 AP 제조사가 ARM의 설계를 기초로 AP를 만들자 AP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소프트웨어도 모두 ARM의 설계 방식에 맞춰 짜였다. 이 같은 네트워크 효과(일단 어떤 상품에 대한 수요가 형성되면 이것이 다른 사람 또는 기업들의 상품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치는 현상)에 따라 ARM이 자연스럽게 AP 설계의 지배자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ARM 기반의 AP가 널리 퍼진 상태에서 만약 삼성전자, 퀄컴 등 AP 제조사들이 ARM 코어를 사용하지 않고 자체 코어를 사용하려 한다면, 호환이 되지 않아 모든 소프트웨어를 다시 만들어야 하는 부담이 생긴다. 한태희 성균관대 반도체시스템공학과 교수는 “ARM이 시장에서 계속 통용되는 이유는 코어를 설계하는 능력도 뛰어나지만 소프트웨어의 호환성 때문”이라며 “AP 생태계가 완전히 ARM을 중심으로 구축된 것”이라고 했다.

ARM이 AP 설계 부문에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자 2016년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은 지분 100%를 인수했다. 234억파운드(약 35조원·주당 인수 가격 17파운드)에 사들였다. 당시 주가보다 43% 이상의 웃돈을 준 가격이었고, 현금으로 일시 지불했다. ARM은 연간 이익이 1조8000억원 안팎에 불과하다.

손 사장은 ARM 인수 후 기자회견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ARM을 M&A한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을 M&A했다.”

이 같은 발언은 손 사장이 ARM을 통해 앞으로 IoT 생태계 또는 시장을 장악하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ARM에 AP의 핵심 기능 설계를 맡긴 기업들은 새로운 AP가 필요할 때마다 ARM에 원하는 AP의 기능을 설명하고 적합한 설계도면을 발주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ARM은 세계 주요 기업들이 구상하고 있는 AP의 청사진과 이 AP가 들어가는 제품군들을 앉아서 들여다볼 수 있다. 손 사장이 ARM을 거액에 사들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ARM을 이용해 끝없이 확장되고 있는 AP 시장의 산업 변화를 파악해 전도유망한 기업을 미리 발견하고 M&A 등의 방식으로 산업의 과실을 거둬들이겠다는 게 손 사장의 전략이다.

plus point

‘나눠먹기’식 반도체 정책 펴는 정부, 삼성의 AP 전략에서 배워야

삼성전자의 비메모리 반도체 전략을 살펴보면 삼성전자가 반도체 산업 하나만을 보고 AP나 전장 반도체를 강화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AP와 전장 반도체를 강화하려는 진짜 이유는 자사의 핵심 제품군과 반도체를 연결해 새로운 판매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것이다.

삼성전자는 반도체뿐 아니라 디스플레이, 가전, 스마트폰 등 다양한 제품을 팔고 있다. 반도체 부문의 이익이 전체 이익의 70%에 달하지만 나머지 사업 부문도 무시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런데 반도체는 메모리 시장에서 세계 1위에 올라갔고 가전이나 디스플레이, 스마트폰 등의 사업 영역도 치열한 경쟁으로 수익을 더 내기 쉽지 않은 포화상태로 가고 있다. 삼성전자로서는 반도체와 반도체 이외의 사업에서 모두 새로운 수요를 창출시켜야 하는 기로에 놓였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까지 삼성전자의 스마트폰을 제어, 통제하는 두뇌 역할을 했던 AP를 다른 제품군에 이식하면 기존에 삼성전자가 판매했던 제품들의 부가가치가 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작동시켜야만 움직이는 청소기만 있는 상황에서 AP로 거실 바닥의 먼지 상태를 항상 체크하다 일정 수준 이상의 먼지가 있다고 판단하면 알아서 청소해주는 청소기가 등장하면 청소기와 AP 시장이 함께 커질 수 있는데 삼성전자는 이 흐름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말한 ‘새로운 시도’란 이런 맥락이다.

삼성전자의 AP 전략은 정부가 추진하는 반도체 클러스터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반도체 클러스터는 앞으로 정부가 10년 동안 120조원을 들여 반도체 관련 사업장을 한곳에 조성하는 것을 말하는데 경기 이천과 용인, 충북 청주와 충남 천안, 경북 구미 등 전국 5개 지방자치단체에서 유치 경쟁을 했지만 최종적으로 용인시가 낙점됐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중 하나인 AP를 통해 어떻게 다른 제품들의 경쟁력을 높일지, 제품과 제품의 연결과 효율성을 고민하는 전략을 택했다.

반면 정부와 지자체는 막대한 세금이 들어가는 반도체 클러스터를 자기 지역의 일자리와 세수 차원에서 접근했다. 산업의 효율성과 경쟁력보다는 분배 차원에서 정부 지원금을 사용하려 한 것이다.

이는 일본 파나소닉의 실패 사례와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파나소닉은 1980~90년대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승승장구한 기업이었다. 하지만 파나소닉은 해안가 변두리였던 호쿠리쿠 지역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등 반도체 산업을 지역 일자리 분배 차원에서 접근했다. 호쿠리쿠 지역은 파나소닉 본사가 있는 오사카와는 300㎞가량 떨어진 북쪽 어촌마을이다.

이런 식으로 반도체 사업을 해왔던 파나소닉은 적자를 이기지 못해 반도체 부문 직원을 구조조정했고 2014년 공장을 이스라엘 반도체 회사에 매각해야 했다.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기업의 힘을 집중시키고 효율성을 높이지 않은 대가였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세금은 무조건 영세·중소기업이나 지방 균형 발전에 써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데 좀 더 넓은 시야로 산업 전체의 효율성을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정해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