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클러스터 계획’ 이상 조짐
‘산업 외 논리’로 허송할 시간 없다
경기 사이클이 뚜렷한 반도체 산업은 무자비한 치킨 게임의 현장이다. 침체와 부활 과정이 그만큼 극적이다. 1980년대 중반 삼성전자가 64KD램 개발에 성공했을 때, 미·일 업체의 덤핑으로 D램 가격이 10분의 1로 폭락했다. 이때 삼성전자의 선택은 반도체 라인 증설이었다. 그 결단이 없었다면 세계 1위 삼성전자 반도체는 없었다. 최악의 반도체 불황기였던 2002년, 채권단 관리에 들어간 하이닉스는 미국 마이크론에 팔리기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하이닉스 이사회는 독자 생존을 선택했다. ‘마지막 생명줄을 포기했다’는 미국 경제지의 비아냥까지 무릅쓰고서였다. 그때 포기했으면 10년 뒤 SK와 결합도, 오늘날 세계 3위 SK하이닉스 반도체도 없었다. 이런 치킨 게임 과정에서 독일 키몬다, 일본 엘피다 같은 세계적 업체가 스러졌다.
머지않아 반도체 강국 한국이 이런 치킨 게임에 거꾸로 당할지 모른다. 천문학적 액수의 돈을 들여 반도체 굴기(崛起)에 나서는 중국 때문이다. 미국의 대중 통상 규제가 우리 반도체에 시간을 벌어주고 있지만, 그 시간이 오래 가진 않을 것이다.
뒷짐만 지고 있던 우리 정부가 오랜만에 움직였다. 1조6000억원을 들여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이 그것이다. SK하이닉스가 10년간 12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혀 더욱 관심이 커졌다. 그런데 이 계획이 묘하게 흘러가고 있다. 전국 지자체 간의 치열한 유치 경쟁 때문이다. 용인·이천·청주·구미가 저마다의 연고와 장점, 필요성을 내세우며 뛰어들었다. 뒤늦게 충남까지 나서 5파전 양상이다. 청와대에 입성한 지역 출신 정치인 이름까지 슬쩍 들먹이며 분위기를 띄우는 곳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