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남녀심리

“시댁 안갔다” “나홀로 여행” 명절날 행동하는 며느리들

Shawn Chase 2018. 9. 27. 10:23
중앙일보 2018.09.27 00:02

결혼 15년차 40대 주부 임모씨는 올해 추석에는 시댁에 가지 않겠다고 남편에게 통보했다. 20대 중반에 결혼해 지난 14년간 명절마다 전과 송편을 만들었던 ‘모범 며느리’의 변심이었다. 남편은 당황했고 함께 책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던 초등학생과 중학생 두 딸은 응원을 보냈다. 
  
“가사도우미 취급, 시어머니 막말”
추석연휴 시댁 성토 SNS에 봇물

“며느리만 일하는 명절 이젠 그만”
조용한 불만 넘어 실제 행동 늘어

임씨는 26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말이 아닌 행동으로 며느리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명절의 틀을 깨버리고 싶었다”며 “서울의 작은 숙소를 잡고 나만을 위한 요리를 만들어 수입 맥주와 함께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지난해 9월부터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임씨는 “시부모님이 노하셨다는 이야기에 불안하고 힘들었지만 여기서 물러나고 싶진 않다”며 “내년에는 돈을 모아 해외여행을 한번 다녀오고 싶다”는 희망도 밝혔다. 임씨와 같이 기존 명절 문화를 거부하는 ‘행동하는 (예비)며느리’들이 늘어나고 있다. 가부장적인 제사 문화에 거부감을 느끼지만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조용한 불만’을 표출해왔던 며느리들이 본격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이미정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사회적 지위가 올라간 여성들이 과거와는 달리 제사라는 가부장적 규범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며 “며느리들이 숨겨왔던 솔직한 심정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추석 연휴를 하루 남긴 26일 여성 인터넷 커뮤니티와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시댁과 남편에 대한 답답함과 불만을 쏟아내는 명절 후기가 쏟아졌다. 제사 때는 현관문으로 여자가 들어오지도 못한다는 사연부터 설거지를 도와 달라고 하니 황당한 반응을 보였다는 남편 남동생의 이야기, 명절 당일 오전 10시에 시댁에 도착한 며느리에게 “늦게 와 꼴도 보기 싫다”는 시어머니까지. 한 여성 사용자는 “이런 명절을 보내는 것은 나 하나로 충분하다”며 “내 딸들에게는 ‘메이드인 코리아 사위’는 사절이라 선언했다”는 글을 남겨 공감을 얻기도 했다. 
  
이런 답답함 속에서 시댁과 남편에게 ‘더는 참지 않았다’는 행동하는 며느리들의 명절 후기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인스타그램에 명절 후기를 남긴 한 여성은 “과거에는 명절 때마다 바보처럼 헤헤거렸지만 올해부터는 시댁에 할 말은 다 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사용자는 “지난해부터 며느리를 가사 도우미로 취급하는 시댁에는 가지 않고 있다”는 경험담을 전했다. 
  
기존 명절 문화에 거부감을 느끼고 결혼 전 남자친구와 제사 문제를 논의하는 예비 며느리도 있다. 결혼을 앞둔 박모(36)씨는 “남자친구에게 설날과 추석 모두 시댁에 갈 수는 없다고 이미 선언을 했다”며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의사를 남자친구에게 계속 강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 직원이 육아를 병행하고 있는 부모 교육 스타트업 그로잉맘의 이다랑(33) 대표는 “여성은 회사에서 퇴근하면 사실상 가정으로 출근하는 것이라 연휴라는 개념이 없다”며 “어떤 여성들에게는 연휴가 길었던 이번 추석이 오히려 더 큰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15년 만에 홀로 첫 명절을 보내고 돌아온 임씨는 기자에게 “남편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면서도 “엄마를 그리워하고 또 반겨주는 두 딸을 통해 희망을 보고 용기를 낸다”고 했다. 남편보다 초등학교 4학년 딸이 ‘엄마만 일하는 명절’에 대해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고 한다. 
  
이어 임씨는 “상황과 처지가 다른 입장에서 다른 며느리들에게도 나처럼 행동하는 것을 권장하지는 않는다”며 “다만 ‘원래 며느리는 이래야 한다’ ‘원래 명절은 이런 것이다’는 생각은 이제 그만둘 때도 되지 않았나”라고 말했다. 
  
이미정 연구위원은 “한국의 제사 문화가 여성의 지위가 상승하고 있는 시대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급격히 쇠퇴할 가능성이 있다”며 “성평등과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시대와 제사라는 전통이 충돌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