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는 트위터에서 “북한 김 위원장으로부터 아주 멋진 편지, 아주 위대한 진전이 이뤄지고 있다!”고 썼다. 트럼프의 트레이드마크인 과장이 읽히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신뢰한다는 본질에는 변함이 없어 보인다. 김정은 위원장은 친서에 이렇게 썼다.
“조미 사이의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려는 나와 대통령 각하의 확고한 의지와 진지한 노력, 독특한 방식은 반드시 훌륭한 결실을 맺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대통령 각하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과 신뢰가 앞으로의 실천과정에 더욱 공고해지기를 바라며 조미관계 개선의 획기적인 진전이 우리들의 다음 번 상봉을 앞당겨 주리라 확신합니다.”
친서에서 두 가지가 눈에 띈다. 하나는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와의 2차 정상회담을 독촉하는 것이다. 틀릴 각오하고 과감한 예측을 한다면 김정은과 트럼프는 9월 유엔 총회 기간 중에 미국의 어디선가 다시 만날 것이다. 둘은 친서에 비핵화에 관한 언급이 없다. 이 부분이 트럼프의 의도와는 반대로 워싱턴 회의론자들의 기를 살려 줬다. 가령 빅터 차는 그것 보란 듯 “그런 편지를 공개했다고 해서 폼페이오의 3차 방북에 뭔가 더 있었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말했다.(김현기, 강태화. 중앙일보 7월 14일자)
그러나 따지고 보면 김정은 위원장의 그런 화법도 협상 전략의 하나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 판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트럼프가 아니라 김정은이라는 불편한 사실이다. 문재인-김정은-트럼프가 함께 돌려야 할 판이 김정은에게 사실상 독점되고 있는 것은 불길하다. 김정은이 너무 나가면 트럼프가 돌발적인 반응을 보여 판 자체가 깨질 걱정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7월 13일 싱가포르에서 낙관론을 폈다. “북·미 양 정상이 국제사회에 약속했기 때문에 실무협상에 우여곡절이 있어도 약속을 지킬 것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국제사회로부터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이 버티기 작전으로 종전선언과 대북 제재 완화 같은 보상을 더 많이 받아내려고 하는 배후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있다고 의심한다. 미·중 무역전쟁의 와중에 북·미 비핵화 실무협상이 진행되는 것은 불운이다. 그러나 시진핑 입장에서도 비핵화의 판이 깨지는 것을 바랄 리 없다. 한반도 사태가 2017년으로 되돌아간다면 시진핑 주석도 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못지않게 체면이 깎인다.
문재인 대통령이 싱가포르에서 말한 대로 실무협상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식의 논쟁으로 어려운 과정을 겪을 수는 있다. 그러나 현 사태의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각하면 비관론보다는 낙관론의 요소가 더 강하다.
북한 인민들은 선악과(善惡果)를 먹어버렸다
그 원점은 김정은 위원장의 대변신 배경이다. 그는 북한을 핵국가의 반열에 올려 미국의 적대정책에 대한 충분한 억지력을 확보했다고 확신했다. 그는 핵무력의 완성을 선언했다. 선언하면서 당과 군과 인민은 경제 건설에 매진할 것을 촉구했다. 핵·경제 병진 정책에서 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남북, 북·미 대화에 나섰다. 김정은의 대전환 동기와 의지가 변하지 않는 한 거북이 걸음으로라도 비핵화와 북·미 관계 정상화는 전진할 것이다. 이제는 북한 인민들의 삶이 획기적으로 나아지지 않으면 김정은의 권력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 500여 개의 장마당에서 북한 인민들은 선악과(善惡果)를 먹어버렸다.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이 가다 서다를 되풀이하는 동안 한국은 대북 국제제재가 허용하는 범위에서 남북관계 개선에 속도를 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지향점을 확실히 정의하는 것이다. 남북한의 어떤 정권도 공식적으로 통일을 포기한다고 선언할 수는 없다. 항상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다. 그러나 4·27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된 것은 한반도 평화다. 평화 정착이 최우선이다. 통일이 끼어들면 평화 정착의 정책에 혼선이 일어난다.
한반도 평화를 통일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재래식 사고다. 그러나 평화는 통일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 달성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7월 베를린에서 한 쾨르버재단 연설, 일명 베를린 선언에서 그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한국은 북한 붕괴도, 무리한 통일도 추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남북한이 평화롭게 사는 동안 어느 시기가 되면 통일은 저절로 올 것이다.” 해석하면 이렇다. 통일은 통일정책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통일정책 같은 건 추진하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한반도 평화다.
비핵화 협상의 어려움은 트럼프 스스로 싱가포르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그는 비핵화가 과학적으로, 기술적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인정했다. 남북한이 1953년 정전 이후 처음으로 전쟁의 위기를 완전히 벗어날 기회를 맞았다. 작년 한 해 우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 위험에 얼마나 전전긍긍했던가! 북핵의 위협은 한반도와 일본에만 해당된다고 믿은 미국은 무책임한 대북 선제공격론을 폈다. 그러다 11월 29일 북한이 뉴욕과 워싱턴을 사정권에 두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에 성공하자 비로소 북핵의 위협에 실존적 위기를 느껴 북한을 협상 상대로 인정하고 나왔다. 이것이 지금 우리 눈앞에 전개되는 사태의 본질이다. 미국의 트럼프 비판자들, 회의론자들, 그 장단에 춤을 추는 일부 한국인이 마음에 깊이 새길 문제의 핵심이란 말이다.
※ 김영희 - 1958년 22세 나이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딘 필자는 82세가 된 지금까지 현장을 누비는 영원한 기자의 길을 걷고 있다. 중앙일보 편집국장, 임원 등을 거치고 최근까지도 중앙일보 대기자 및 칼럼리스트로 활동했다. 올해로 기자 활동 60주 년을 맞는 그는 외교·안보·국제 뉴스의 한 우물을 판 역사의 증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