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 서행(西行)할 당시에 호종했던 사람들에게 녹훈할 것을 전교하였는데 이제 왜적도 몰아내고 명나라 군대도 철수하였으니 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장사(將士)도 비록 적을 초멸(勦滅)하지는 못하였지만 그중에는 힘껏 싸워 공을 세운 사람도 있을 것이니, 역시 자세히 살펴서 함께 녹훈하도록 하라.” (『선조실록』34년 3월 10일)
1601년. 임진왜란이 종결된 지 3년 만에 공신에 대한 조사가 시작됩니다.
7년간의 전쟁에는 이순신·김시민 등의 관군뿐 아니라 고경명·조헌 등이 이끌던 의병, 사명당·서산대사 등의 승병, 심지어 적장을 껴안고 촉석루에서 뛰어든 논개 같은 기생까지 참으로 다양한 계층이 나섰습니다.
조사를 명령한 선조의 발언부터 무언가 마뜩치 않은 분위기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나라 장사(將士)도 비록 적을 초멸(勦滅)하지는 못하였지만, 그중에는 힘껏 싸워 공을 세운 사람도 있을 것이니…”
선조의 발언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었을까요.
①호성공신(扈聖功臣): 의주까지 시종(始終)하고 거가(車駕)를 따른 사람들
②선무공신(宣武功臣): 왜적을 친 제장(諸將)과 군사와 양곡을 주청(奏請)한 사신(使臣)들
③청난공신(淸難功臣): 이몽학(李夢鶴)을 토벌하여 평정한 사람
호성공신은 선조의 피난길에 함께한 신하들이고 선무공신은 주로 왜적과 맞서 싸운 장수들입니다. 청난공신은 임진왜란 중 벌어진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신하들로 큰 의미는 없었습니다.
선조 36년 4월 공신도감에서 이순신, 권율, 원균, 김시민, 곽재우 등 26인의 무장을 선무공신으로 추천했지만 선조는 이순신, 원균, 권율, 고언백 등 4인 외엔 인정하기 어렵다며 거부했습니다. 결국 14인의 무장만 선무공신으로 선정되는 절충안이 마련됐습니다.
이 명단에는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며 일본군에 맞서다 전사한 동래부사 송상현이나 '홍의장군'으로 불린 의병장 곽재우 등 우리에게 익숙한 많은 장수들이 빠졌습니다.
어느 정도는 예견된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공신 조사를 지시하고 나흘 뒤 선조는 이렇게 ‘가이드라인’을 내밀었습니다.
“이번 왜란의 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명나라 군대의 힘이었고 우리나라 장사(將士)는 명나라 군대의 뒤를 따르거나 혹은 요행히 잔적(殘賊)의 머리를 얻었을 뿐으로 일찍이 제힘으로는 한 명의 적병을 베거나 하나의 적진을 함락하지 못하였다.” (『선조실록』34년 3월 14일)
당시 선조와 신하들이 나눈 대화를 따라가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①『선조실록』 35년 7월 23일
“전장에서 뛰어나게 힘을 발휘한 자들에 대해서는 상께서 이미 통촉하고 계실 테니 몇 명 정도 뽑아내 융통성 있게 마련한다면… 정왜(선무)공신이 호종공신에 비해 지나치게 적으면 뒷날 장사(將士)들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염려됩니다.”(비변사)
“힘껏 싸운 장사(將士)들에 대해서는 그 공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겠으나 우리나라 장졸에 있어서는 실제로 적을 물리친 공로가 없다.” (선조)
② 『선조실록』 37년 6월 21일
“싸움터에서 자신을 잊은 채 힘써 싸운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도 이순신ㆍ원균 이외에는 고언백 1명만 넣었을 뿐이고 그 이외는 현저하게 녹훈할 만한 공이 있는데도 모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녹훈한다면서 이처럼 매몰스럽게 했으니, 어떻게 전사(戰士)들의 마음을 격려 권면하여 분발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항복, 유영경, 기하헌 등)
“(선정된) 이외의 장사(將士)들은 진실로 적을 무찌르면서 역전(力戰)한 공이 없다. 설혹 성(城)을 지킨 노고와 어느 한 곳에서 역전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옛 사례와 비교해보면 단서철권(丹書鐵券ㆍ공신들에게 수여하던 상훈 문서와 쇠로 만든 표지)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선조)
“이번 적변(賊變ㆍ임진왜란을 가리킴)은 전에 없던 변고로서 변변찮은 나로 말미암은 소치다. 그런데 명나라 조정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적을 몰아내고 강토를 회복했으니 이 또한 옛날에 없던 공적이다. ”(『선조실록』 35년 7월 23일)
“명나라 군대가 나오게 된 연유를 논하자면 여러 신하들이 어려운 길에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따라 의주까지 가서 명나라 조정에 호소했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왜적을 토벌하고 강토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선조실록』34년 3월 14일)
다시 말해 조선 측 관군과 의병들의 활약을 한사코 깎아내린데는 선조 자신을 임진왜란의 주연(主演)으로 띄우려는 정치적 판단이 숨어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실망하고 위협을 느낀 곽재우 같은 의병장은 아예 산속으로 숨어버립니다. 대신들의 경고와 우려는 현실이 됩니다.
한 세대가 지난 뒤 일어난 정묘·병자호란에서는 이전 같은 의병들의 활약상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던 정부가 수 년간 땀 흘린 선수단을 배제한 데 대해 실망했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습니다.
의대생, 피아노 전공자 등 다양한 경력을 지닌 선수들이 본업을 놓고 스폰서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올림픽을 바라보고 훈련했지만 정치적 논리에 따라 자리를 내어주게 됐기 때문입니다.
설령 남북 단일팀이 성공한다고 해도 스포트라이트는 선수와 감독이 아니라 이를 공동연출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에게 쏟아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 총리는 지난 16일 기자 간담회에서 “여자 아이스하키는 우리가 세계랭킹 22위, 북한이 25위로 메달권 밖”이라며 “우리 선수들도 (북한 선수 추가에) 큰 피해의식이 있지 않다”고 밝혔습니다.
여자아이스하키 대표팀 박채린(20) 선수의 어머니 이은영(50)씨는 “어차피 1등을 못하는 선수들이니까 북한 선수들하고 같이 뛰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정치적인 쇼나 하라는 말인지도 모르겠다”며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500년 전 선조는 ‘재조지은’이라는 정치적 담론을 위해 전장에서 고군분투했던 조선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장사(將士)들이 왜적을 막는 것은 양(羊)을 몰아다가 호랑이와 싸우는 것과 같았다. 간혹 그 가운데에 잘하였다고 하는 자도 겨우 한 성을 지킨 것에 불과할 뿐이다.”
묵묵히 받아적던 사관은 자신의 군대를 깎아내리는 임금의 강변 뒤에 이렇게 남겼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공로에 보답하는 것은 국가의 막중한 행사이다. 막중한 행사인데도 사람들에게 가볍게 시행하였으니 어찌 매우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정왜(征倭ㆍ왜적 토벌)가 비록 중국 장사(將士)들의 공이라고는 하나, (조선 장사들도) 맞서 싸워 승전한 공이 없지 않았다. 싸움에 임한 장사들을 소략하게 하였으니, 공에 보답하는 방도를 잃었다고 할 만하다.” (『선조실록』36년 2월 12일)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노영구『공신선정과 전쟁평가를 통한 임진왜란 기억의 형성』, 임기영『「宣武原從功臣錄券」에 관한 書誌的 연구』, 김강식 『조선후기의 임진왜란 기억과 의미』를 참고해 직성했습니다.
[출처: 중앙일보] 1등 못하니까 괜찮다?···공로에 보답하지 못하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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