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이슈

[Why] 실업급여… 돈이냐 '존엄'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Shawn Chase 2017. 8. 27. 17:59


남정욱 '대한민국문화예술인' 공동 대표  




입력 : 2017.08.26 03:02

[남정욱의 명랑笑說]



서른 중반 무렵 실업급여라는 걸 타 본 적이 있다. 90만원씩 석 달을 받았는데 무능과 불운이 사정없이 교차하던 때라 밖에 나가 일해 봐야 월수입 200만원을 넘기기 힘들었던 시절이다. 그런데 일을 안 해도 돈을 준다니, 아니 이런 신기하고 바람직한 일이 또 있나. 게다가 교통비니 식대니 자잘하게 나가는 비용까지 따져보면 오히려 남는 장사였다. 조건도 별게 없었다. 한 달에 구직 활동을 세 번 이상 했다는 증명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종일 침대에서 뒹굴다가 저녁때 친구들을 만나 술 마시고 들어와 자면 일과 끝. 노는 거 다 아니까 술값 내라는 소리도 없고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천국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신나고 즐거웠던 건 아니다. 첫 달에는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상담사와 면담하려고 긴 줄 끝에 서 있다 보면 내가 이러려고 세상에 나왔나 자괴감이 들고 우울증이 밀려왔다. 구직 활동은 나의 무능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자리였다. 채용 담당자가 "자격증이나 특별히 잘하는 게 있습니까?" 하고 물을 때마다 나는 죽었다(그런 게 있으면 내가 너하고 이렇게 마주 앉아 있겠니). 정신 건강을 위해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 실격'을 읽었다. 나는 그래도 이 인간보다는 낫지 않은가 열심히 위로하면서.

둘째 달부터는 아니었다. 나는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내 권리를 정당하게 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바꿔 먹으니 위축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구직 활동에도 요령이 생겼다. 생면부지 사람을 찾아가서 이력서를 내미는 건 초보들이 하는 짓이다. 사업하는 친구에게 전화로 부탁해 면접 기록을 남겼다. 생각이 날로 기발해졌다. 고용보험 가입 사업장에서 6개월 일했다는 증거만 있으면, 그리고 자발적으로 그만둔 게 아니라 회사 사정상 퇴사한 것이라는 기록만 있으면 수급 자격이 생기는 거였다. 잘만 관리하면 6개월 일하고 3개월은 이렇게 불로소득으로 사는 인생도 가능할 것 같았다. 다음번 실업급여를 받을 때는 허투루 돈 쓰지 말고 알뜰히 모았다가 해외여행을 갈 계획을 세웠다. 얼마 후 불운(!)하게도 취업하는 바람에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발상 자체를 접지는 않았다. 자존감을 포기하고 잠시의 모멸을 견디면 3개월이 행복한데.

취임 100일 만에 이 정부는 100조원에 이르는 복지 정책을 발표했다. 나랏빚이 늘어난다, 결국은 증세로 돌아온다, 5년 뒤 나라 살림은 어쩌려고 하느냐 다들 걱정이 많으신데 솔직히 소생은 재정 펑크나 재원 확보 같은 얘기에는 별 관심이 없다. 복지는 돈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가치관과 삶의 지향점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5년 뒤 거덜난 곳간이 문제가 아니라 망가지고 둔감해진 개인들이 진짜 문제라는 얘기다.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나, 다 니엘 블레이크'라는 영화가 있다. 복지국가의 우울한 이면을 다루고 있는데, 사람들에게 돈 몇 푼 던져주는 게 복지가 아니라 그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이 복지라는 메시지를 진중하게 던진다(참고로 감독 켄 로치는 삶과 이념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최고의 좌파다). 주인공은 담담하게 말한다. "국가는 나를 존중해 주길 바랍니다." 오래전 그 3개월이 많이 부끄럽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25/201708250187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