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및 연예

[ 人side Dream] 쇼를 많이 판 남자, tvN 본부장 이명한 "'응답하라' '삼시 세끼' 성공 비결은 망해도 좋다"

Shawn Chase 2016. 5. 9. 00:16

김지수 대중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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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4.23 07:00 | 수정 : 2016.04.24 08:32 


“개국 10년 tvN, ‘이명한 리더십'으로 공중파보다 감도 높은 채널로 거듭나"
“육성, 브랜드, 자율의 3박자, ‘삐딱이'에 관대한 문화가 조직 성장 동력"
“나영석의 데뷔작 ‘꽃보다 할배' 시청률 나온 날 눈물 흘려"



tvN 본부장 이명한(46세). tvN 채널을 변방에서 중심으로 이끈 핵심적인 인물이다. 경희대학교를 경영학과 졸업하고 1995년 KBS 22기 공채 PD로 입사해 ‘1박2일’을 인기 반열에 올려놓았다. 2011년 5월 tvN으로 이직 했다./사진=장련성 기자

tvN 본부장 이명한(46세). tvN 채널을 변방에서 중심으로 이끈 핵심적인 인물이다. 경희대학교를 경영학과 졸업하고 1995년 KBS 22기 공채 PD로 입사해 ‘1박2일’을 인기 반열에 올려놓았다. 2011년 5월 tvN으로 이직 했다./사진=장련성 기자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많은 경우 진실이다. 이명한(46세)은 KBS에서 ‘여걸식스' ‘1박 2일' 등을 만든 예능 PD였지만, 지금은 tvN의 드라마, 예능, 교양 도합 21개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본부장이다. 그는 한 개의 예능 프로를 만들어 ‘브랜딩'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한 개의 채널을 운영한다.

나영석 PD, 신원호 PD, 그리고 둘 사이를 오가며 예능도 쓰고 드라마도 쓰는 만능 작가 이우정이 모두 ‘이명한 사단'의 일원이다. KBS 시절 ‘여의도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모여 놀던 ‘방송계의 철없는 천재들'이 이명한의 부름에 차례로 tvN으로 온 이후, tvN은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70대 할아버지부터 꽃 같은 여배우, 혈기왕성 청춘들을 적절히 모객해서 배낭여행의 꿈을 이뤄주었던 ‘꽃보다 OO', 망망대해, 첩첩산중에 세끼 밥 지어 먹는 일만으로 행복했던 ‘삼시 세끼' 시리즈, 골목 공동체의 기억에 울고 웃던 국민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는 장기불황의 ‘서바이버'에 지친 대중을 대거 TV 앞으로 불러 모았다.

‘이명한 사단’이 만들어 낸 것은 모두가 꿈꾸는 일종의 ‘환타지'였다. 그것은 각자도생에 지친 자들을 위한 찬란한 위로였고 임의로운 도피였다. 한동안 온몸으로 울고, 웃는 자들로 온 동네가 시끄러웠다.

방송이란 무엇인가. 하루의 힘든 일과를 마치고 우리는 식구들과 TV 앞에 둘러앉는다. 혹은 모두가 잠들었을 때 홀로 깨어 TV를 켠다. 그것은 나와 타인을 연결해 주는 가장 쉬운 ‘소통의 창'이며 동시에, 나 혼자 누릴 수 있는 가장 고독한 잠행이다.

혼자 있고 싶을 때나, 함께 있고 싶을 때나 나는 tvN의 프로그램에 많은 위로를 받았다. 특별히 tvN의 드라마 ‘나인'이나 ‘미생' 그리고 ‘시그널' 등은 규제가 까다롭고 관료화된 공중파의 ‘막장 드라마'나 ‘신파적인’ 가족 드라마에서는 볼 수 없는 제3의 서늘한 세상을 열어주었다.
5월에는 노희경 작가의 신작 ‘디어마이프렌즈’가 tvN에서 ‘시니어 드라마’의 포문을 연다고 한다. 김혜자, 나문희, 고현정, 고두심 등의 60대 스토리는 ‘꽃보다 할매'의 드라마 버전이 아닐까 예상해 본다.

tvN 본부장 이명한을 만났다. tvN의 외부 인사 영입 전략에서 ‘신의 한 수'라 불리는 사람. 나영석과 신원호, 신효정 등 스타 PD들을 대거 영입해 ‘망해도 된다'는 창조적 놀이터를 깔아준 예능 왕국의 덕장.
‘리얼버라이어티'의 새 지평을 연 ‘1박 2일'의 개국공신.

개국 이후 tvN은 7년간 적자였다. 2013년부터 흑자로 접어들어, 2015년은 개국(2006년) 당시보다 10배 이상의 매출을 거둔 것으로 추정된다. 이명한은 그 동력을 서로 닮은꼴 DNA를 지닌 ‘집단의 힘'이라고 설명했다. 쌀집 아저씨 같은 푸근한 인상이었다. 치열한 미디어 조직에서 성공한 남자에게 자동으로 따라붙는 ‘꼰대' 비슷한 기질이 전혀 없었다.

그는 나영석, 신원호 등 스타 PD를 영입해 TV문법을 넘어서는 다양한 시도를 했다. 덕분에 tvN은 공중파와는 확연히 다른  차별화한 콘텐츠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tvN의 광고 단가는 공중파 못지 않은 금액으로 업계에 통용되고 있다./사진=장련성 기자
그는 나영석, 신원호 등 스타 PD를 영입해 TV문법을 넘어서는 다양한 시도를 했다. 덕분에 tvN은 공중파와는 확연히 다른 차별화한 콘텐츠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tvN의 광고 단가는 공중파 못지 않은 금액으로 업계에 통용되고 있다./사진=장련성 기자



-인상이 ‘쌀집 아저씨' 이상으로 좋으시네요.

“저는 대중들에게 웃음을 주는 예능 PD 출신이에요. ‘동원’ 방청객을 빼고 일하면서 박장대소하며 웃을 수 있는 직업이 얼마나 되겠어요. 법원이나 병원, 은행에 계신 분들보다 물리적으로 웃는 시간이 많죠. 그렇게 웃는 게 제가 버티는 힘이에요. 수많은 직업이 있지만, 노동 강도의 세기에 비해 만족도가 꽤 높아요(웃음).”

-방송국 PD의 노동 강도가 정말 세다고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어느 정도인가요?

“드라마와 예능이 차이는 있지만, 예능 PD는 편집이 7할을 차지해요. 48시간 동안 한숨도 안 자고 편집하는 경우엔 육체적으로 극한까지 가요. 제가 현업에 있을 땐 젊은 나이에도 매주 대중에게 심판받는 느낌에 압박이 심했어요. 방송 전 프리뷰를 하는 날엔, 새벽에 딱 자살하고 싶은 맘이에요(웃음).”

-아이러니군요. 박장대소 끝에 자살하고 싶을 정도라니...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자막을 입히는 데, 이틀 밤새우고 걸레가 된 몸으로 자막을 쓰고 있노라면 “아! 자막 쓰는 기계가 발명되면 좋겠다"란 마음이 간절했어요(웃음). 그런데 얼마 전, 알파고가 바둑을 이기는 것 보고는, “바둑은 이겨도 설마 자막은 못 쓸 거다"는 자신이 생겼어요. 자막 쓰는 건, 일종의 나레이션이고 드라마고, 웃음을 주는 행위니까... 직업 안정성 측면에서 괜찮겠구나 싶죠.”

-그렇게 치열하게 만든 프로그램이 ‘대박'나면, 로또 맞은 것처럼 기쁘겠습니다.

“상당히 역설적인데 PD 입장에서는 프로그램이 대박 나면 재미가 없어져요. 무에서 유를 만들 때, 정체성이 만들어지면서 커나갈 때, 부모 입장에서 보람이 있죠. 프로그램은 유기체와 비슷해서 대중들이 너무 좋아하면 인격이 입혀져서 창작자가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줄어들어요.

내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닌 게 되죠. ‘1박 2일'을 할 때, 처음엔 ‘리얼 야생 버라이어티'로 터프하게 시작했어요. 출연자들에게 벌칙으로 까나리 액젓도 마시게 하고, 밖에서 재우고… 그런데 대중들이 점점 훈훈한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기대하면, 또 변해가는 거죠 시청자들과의 공유물이니까 내 손을 떠나서 공인으로 성장하게 돼요.


-예능은 시청자들과의 공유물이다?

“네. 쪽박 차면 내 맘대로 해도 되고요(웃음). 대박 나면 좋지만 론칭했을 때의 활력은 줄어들어요. 확실히 인기에 눌리는 면이 있죠(웃음).”

-사십 대 후반에 접어들면 체력이 떨어졌을 법도 한데 활력이 넘치시는군요.

“이쪽 일 하는 사람의 교훈이 ‘철들면 망한다'예요. 콘텐츠의 본질은 판타지와 연결되어 있어요. 철이 없어야 궤도에서 벗어날 수 있고, 궤도에서 벗어난 헐렁함이 판타지를 보게 해주죠.”

-가장 철이 없을 때는 언제였나요?

“결과적으로 ‘1박 2일' 만들 때가 가장 자신감이 넘쳤어요. 망해도 두렵지 않았어요(웃음). 그러니까 저지를 수 있었고 힘들어도 극복할 수 있었죠.”

-KBS를 나온 것도 철없는 행동 중 하나였나요?

“철이 없었죠. KBS는 너무나 좋은 직장이지만, 나 같은 성정의 인물은 좀 더 도전적인 곳에 어울린다는 판단이었어요. KBS에 있었으면 CP, 국장, 본부장 이렇게 차곡차곡 밟아 올라갔겠죠. 한편으로 그곳은 뛰어난 제작 인력으로 남는 게 명예로운 구조는 아니었기 때문에, 저는 평생 ‘만드는 사람' 집단 편에서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은 거죠. 철없던 생각이었는데, 본능적으로 잘 선택했어요(웃음). ”


배우 정원중을 닮은 이명한. 후덕한 인상에 걸맞게 그는 후배들에게 덕장으로 소문 나 있다. 후배 PD들의 프로젝트를 적극 지원하고, 참여 스태프들을 가족처럼 대하는 것으로 미디어 경쟁 시대에 휴머니즘 시스템을 안착시킨 이명한./사진=장련성 기자

배우 정원중을 닮은 이명한. 후덕한 인상에 걸맞게 그는 후배들에게 덕장으로 소문 나 있다. 후배 PD들의 프로젝트를 적극 지원하고, 참여 스태프들을 가족처럼 대하는 것으로 미디어 경쟁 시대에 휴머니즘 시스템을 안착시킨 이명한./사진=장련성 기자


-그 뒤 철없는 후배들을 대거 영입했지요? KBS 시절에 함께 어울리던 ‘여의도 연구소' 일원인 나영석, 신원호 PD와 이우정 작가를 데려온 것이 tvN의 도약 엔진이 됐다고 보는데요.

“건강하게 철없는 친구들이죠. 여의도 연구소는 나영석, 신원호, 이우정, 그리고 제가 모인 말도 안 되는 사조직이었어요. 철없는 인간들이지만, 자기 컬러가 명확하고 그 안에 따뜻함이라는 공통 시각을 가지고 있었지요. 저는 그들만큼 따뜻하진 않아요(웃음). 그 친구들이 주니어일 때부터 같이 일했는데, 결국 내 인생에 가장 의미 있는 인연이 되고 말았어요.”

-여의도 연구소의 핵심 엔진은 무엇이었습니까?

“처음엔 KBS에서 마이너한 인간들끼리 모여 신세 한탄하는 식이었는데(웃음), 역시나 그 철없음의 시너지가 가장 파워풀한 역량이 됐어요. 영리하게 대중과의 접점을 먼저 찾으려 들었다면, 대중들이 그렇게 반응 안 했을 거예요. 각자 자기중심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중들이 열광한 거죠.”

-이명한 리더십에 대해서 후배 PD들의 지지가 막강합니다. 신효정 PD는 “이명한 본부장은 아버지같다… 확실하게 믿어주고, 즐겁게 밀어준다”고 하더군요.

“연출자는 많게는 70~80명까지 모인 한 유닛의 장이에요. 내가 아무리 똑똑해도 한계치가 있어요. 아무리 뛰어난 연출자라도 그 기여도는 30% 이상을 넘지 못해요. 나영석 PD가 아무리 브랜드라고 해도 30% 이상 영향을 못 미쳐요.

연기자와 작가와 후배 PD들이 나머지를 채우죠. 특히 편집과 자막은 정말 중요한데, 그걸 후배들이 해요. 내가 아무리 뛰어나도 후배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고 근무 태만하면 품질이 떨어지죠. ‘1박 2일'을 제가 기획하고 메인 PD 할 때, 나영석이 세컨드, ‘삼시 세끼-어촌 편' 만들었던 신효정이 서드를 했어요.

그런데 그 자막을 다 신효정이 썼거든요. 리더는 백업이 안 되면 부가가치가 안 나와요. 그걸 인정하고 계속 기회를 주는 거죠.”

-충성심을 끌어내는 본질이...
인간은 누구나 좋은 선배 밑에서 육성되고 싶은 욕구가 있어요. 내가 진심으로 후배를 키워주면 자발적으로 따릅니다(웃음). 그러면 회사가 저절로 크죠.”

-한편 나를 넘어서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지 않나요?

“제가 조직을 운영하는 3가지 원칙이 육성, 브랜드 자율이에요. 나영석, 신원호도 자신을 넘어서는 후배가 나와야 그들 자신의 가치가 높아져요. 리더는 ‘나보다 잘난 후배들이 내 주위에 포진해서 나를 리스펙트해주는’, 그런 구조를 만들어야죠.”

-나영석이나 신원호 같은 PD가 개개인 스타로 대중적 주목을 받아도, 조직 내부에서 교만은 금물이겠군요.

“아무리 스타라도 자기 이름이 천 년, 만 년 갈 수가 없어요. 내 DNA를 가진 후배들이 나를 넘어선다는 것을 인정하고, 칼 안 맞게(웃음), 잘 관리해야 해요. 그러면 그들도 진심이라는 걸 느껴요.”

이명한 본부장의 지휘로 신원호 PD의 ‘응답하라’의 시리즈, 나영석 PD ‘꽃보다’ 시리즈와 ‘삼시세끼’ 시리즈, 김원석 PD의 ‘미생’, 고민구 PD의 ‘집밥백선생’ 등이 연이은 대박 행진을 이어갔다. 2015년 9월에는 신개념 라이프 엔터테인먼트 채널 ‘O tvN’을 개국, 중년층 시청층을 아우르겠다는 목표를 밝혔다./사진=장련성 기자
이명한 본부장의 지휘로 신원호 PD의 ‘응답하라’의 시리즈, 나영석 PD ‘꽃보다’ 시리즈와 ‘삼시세끼’ 시리즈, 김원석 PD의 ‘미생’, 고민구 PD의 ‘집밥백선생’ 등이 연이은 대박 행진을 이어갔다. 2015년 9월에는 신개념 라이프 엔터테인먼트 채널 ‘O tvN’을 개국, 중년층 시청층을 아우르겠다는 목표를 밝혔다./사진=장련성 기자

-굉장히 끈끈해 보입니다.

“내가 큰 게 ‘집단의 힘'이라는 걸 인정해야 해요. 서로가 끊을 수 없는 끈으로 연결돼 있다는 거죠. ‘꽃보다 OO’ 시리즈와 ‘응답하라' 시리즈가 서로를 돕는 모습을 보세요. 프로그램끼리 컬래버래이션을 통해 힘을 받잖아요. 그렇게 서로 닮은꼴 DNA를 지닌 ‘집단의 힘'이 tvN의 힘이 되는 거죠.”

-‘꽃보다 OO’ ‘삼시 세끼’와 ‘응답하라' 시리즈를 보면 시간 여행과 공간 여행이 핵심입니다. tvN이 만들어 공전의 히트를 친 ‘나인'이나 ‘시그널'같은 드라마도 고전적인 드라마 문법과 달리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타임 시프트’ 구조로 긴장을 높였어요. 현실을 ‘새롭게 보기'의 한 방법으로 그런 식의 ‘시공간 재배열' 기법을 즐겨 활용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창의성을 얘기할 때 본질적인 고민은 새로운 것이거든요. 근데 저는 ‘새로운 것’이 세상에 없던 것을 창조하는 게 아니라고 봐요. 주변에 흔한 것, 익숙한 것을 재발견하고 재배치하는 것이죠. 관점을 달리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가령 ‘꽃보다 할배' 시리즈도 익숙한 걸 맥락에 맞게 새롭게 배치해서 히트를 친 사례예요.

이순재, 신구, 백일섭, 박근형… 네 분의 어르신이 함께 모이는 게 신선하고, 그분들이 젊은 친구들이 하는 배낭 여행을 한다는 이질감이 프로그램의 ‘야마'가 된 거죠. 창조성을 고민할 때 보편적인 걸 무시하면 안 돼요. 보편적인 걸 다른 앵글로 보는 훈련이 핵심인 거죠. 블랙스완이라고 들어보셨나요?”

-‘블랙스완', 흑조 말인가요?

“제임스 쿡이라는 영국 탐험가가 1700년대에 신대륙에 가서 ‘블랙 스완'을 보고 충격을 받는 사건이 있어요. 백조만 생각했지, 흑조가 있을지 어떻게 알았겠어요?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그걸 보고 “우리 상식이 뒤집힐 수 있다"는 개념으로 ‘블랙스완' 개념을 정립하죠.

콘텐츠를 창작하는 사람들은 본인이 ‘블랙 스완'이 되겠다는 용기가 있어야 해요. 그게 제가 꼭 지키고 싶은 tvN의 DNA이기도 하고요. 조직이 커지면서 ‘블랙 스완' 정신이 위축될 수도 있는데, 그게 훼손되지 않도록 잘 세팅하는 게 지금의 가장 큰 고민이기도 해요.”

-‘응답하라’ 시리즈의 제작 방식이 ‘상식은 뒤집힐 수 있다'는 블랙 스완의 전형이었겠군요.

“일단 모든 게 ‘부담 없이 한번 해보자'에서 시작됐어요. 채널의 사이즈에 맞게, 예능 PD의 체력에 맞게. ‘응답하라' 시리즈의 경우엔 이 팀들이 드라마를 안 해봐서, 예능 시스템으로 했어요. 드라마 PD는 1년에 작품 하나 하지만, 예능 PD는 1년에 50편을 스토리텔링하니까 잘할 수 있는 거로 가자, 한 거죠.

아이디어 회의에 퍼스트부터 막내까지 전부 참여해서… 끝나고 보니까 이게 1990년대부터 미국 드라마 시리즈가 만들어진 집단 창작시스템이었어요. 그런 시스템으로 하면 실패 확률이 적어요(웃음).”

-드라마 ‘미생’, ‘나인’, ‘시그널’은 다른 경우죠?

“그건 정통 드라마 방식으로 만들었죠. 그런데 그것도 공중파에서 제작하는 드라마의 톤 앤 매너와는 확실히 다르죠. 소재나 드라마 진행 방식이 훨씬 차별적이고 파워풀하죠.”

-드라마 ‘미생' 인기를 끌 때 ‘회사가 전쟁터라고? 밖은 지옥이다'라는 대사가 인기를 끌었는데, 이젠 온통 ‘태양의 후예'의 ‘사과할까요? 고백할까요?’ 얘기뿐입니다. 확실히 대중문화 전성시대예요(웃음). 어쨌든 ‘태양의 후예'의 정통 드라마 전개 방식과 신드롬에 tvN이 좀 타격을 입지 않았습니까?

“시청률 면에서 ‘태양의 후예'가 이룬 40%대 돌파는 한계를 뚫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봐요(웃음). 거기로만 관심이 쏠려서 물론 힘들었지만, 한계를 뚫어준 게 또 동력이 돼요. ‘응답하라' 시리즈도 케이블 시청률로 20% 벽을 넘었으니, 이제 30%를 향해 가야죠.”

tvN에서는 현재 ‘코미디빅리그' ‘수요미식회' ‘집밥 백선생' ‘SNL’ ‘현장 토크쇼 택시' ‘배우 학교' 등 총 21개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다. 상암동의 미디어시티가 내려다 보이는 이명한 본부장의 사무실/사진=장련성 기자
tvN에서는 현재 ‘코미디빅리그' ‘수요미식회' ‘집밥 백선생' ‘SNL’ ‘현장 토크쇼 택시' ‘배우 학교' 등 총 21개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다. 상암동의 미디어시티가 내려다 보이는 이명한 본부장의 사무실/사진=장련성 기자

-‘태양의 후예'를 집필한 김은숙 작가도 tvN에서 차기작을 논의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빠 어디가?’를 만든 MBC의 김유곤 PD와 ‘라디오 스타'를 연출한 전성호 PD 역시 tvN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 게 맞습니까?

“그분들이 MBC에서 오신다면 저희는 당연히 환영합니다(웃음).”

-왠지 돈 걱정은 안 하는 것 같다는 인상이 드는데요.

“저희 조직이 굉장히 효율적이에요. 슬림하게 운영하고 있어요(웃음). 돈 생각 안 할 수는 없지만, ‘지금 당장 돈 벌어라'는 아니에요.”

-조직의 잠재적 부가가치에 대한 확신으로 느껴집니다.

“10년 전, 1천억 원씩 쏟아부었던 효과가 2~3년 전부터 나고 있어요. 10년의 투자 비용이 조직 문화를 정착시켰고, 그 문화가 앞으로 돈을 벌어들일 거라고 봐요. 다양한 시도를 벌일 판이 만들어 졌으니까요(웃음).”

-CJ E&M이라는 거대 엔터테인먼트 왕국에서 tvN은 어떤 존재죠?

“tvN은 강소국 네덜란드 같은 존재예요. 땅은 작지만, 축구, 렘브란트, 디자인, 화훼 등 요소요소에 경쟁력이 있죠. 저희는 수많은 악동의 창발성과 운동성으로 굴러가는 작지만 단단한 나라예요. 그리고 저희는 하나의 케이블 채널로 머물고 싶지 않아요(웃음). 5년 후엔 홍대, 연남, 가로수길 등 핫한 장소에 tvN의 멀티 플래그십 스토어를 만들 계획이에요. 영화도 보고 커피도 마시고 기념품도 살 수 있는 곳으로요(웃음).”

-초기에 tvN을 떠올리면 현장 토크쇼 ‘택시'나 기괴한 재주를 지닌 일반인이 출연하는 ‘화성인 바이러스', 시트콤 ‘막돼먹은 영애 씨' 등 뭔가 B급 정서가 강한 저돌적인 케이블 정도로 생각됐었어요. 2011년 KBS에서 이명한 PD를 전격 스카우트하고 연이어 히트작이 터지면서 확실히 ‘때깔'이 달라진 느낌입니다. 요즘엔 공중파보다 tvN을 본다는 사람도 많습니다. tvN 개국 10년, 어디쯤 왔다고 보나요?

“tvN은 사람으로 비유하면 10살짜리 소년이에요. 초등학교 3학년 아이의 미래는 아무도 모르죠. 다만 공부도 잘하고 운동 신경도 좀 있고, ‘엄친아'가 될 가능성이 있는 소년이면 좋겠어요. tvN을 처음 만들었을 때부터 이 ‘아이'가 일반적인 능력, 공부만 잘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고 해요.

어쨌든 망해도 좋으니까(웃음), 기존의 방송 채널과는 차별화되는 새로운 시도를 해보라는 그런 좋은 양육 시스템이었던 거죠.”

-망해도 좋다...

“삐딱하게 바라보는 것에 관대했고, 그것이 tvN의 조직 문화의 힘이었어요. 콘텐츠를 만드는 집단이지만, 어쨌든 비즈니스 구조 안에 있기 때문에 ‘다르게 생각하라'는 게 말뿐이기 십상이거든요. 그런데 저희 집단은 그게 현장에서 지켜졌어요. 저희가 좀 더 튜닝이 돼야겠지만, 확실히 그 ‘삐딱함'을 인정한 게 10년 성장의 동력이 됐어요.”

-경영자의 의지가 확실했나요?

“그렇습니다. 조직의 윗분들이 나보다 멀리 보고 있다는 게 큰 자극이 됐어요. 사실 지금부터 2~3년이 더 중요해요. 지금 tvN은 임계점에 있어요. 활주로를 엄청 달리는 시점이에요. 지금의 체력을 떨어뜨리지 않고 날아올라야죠.”

-아슬아슬한 측면도 있죠? 얼마 전 막 내린 ‘꽃보다 청춘'에서는 청년 연예인들이 해외여행 에티켓을 지키지 않았다고 말이 많았고, ‘코미디 빅리그'도 개그맨 장동민의 한부모 가정 비하 개그로 사과 방송을 했습니다.

“실수한 부분은 바로 사과하는 게 현실적으로 맞는 판단이라고 봐요. ‘1박 2일' 할 때도 독도에서 자장면 만들어 먹는다고 해서 욕을 먹었고, ‘꽃보다 청춘'이나 ‘코미디 빅리그'도 객관적으로 실수가 있었어요. 예능 PD가 힘든 게 본인은 풍자로 접근해도, 이게 프레임이 되면 ‘아차!’ 싶을 때가 있어요.”

-반면 ‘SNL’은 초기의 풍자적인 패기가 사라져서 아쉬운 점도 있어요. 항간에는 ‘여의도 텔레토비'며 정치 풍자를 세게 해서, 그 뒤 여러모로 회사가 힘든 부분이 있었다는 말도 돌았는데요.

“저희 채널과 제작진이 ‘SNL’에 대해 생각하는 정체성은 정치 사회적 이슈보다 스튜디오 콩트에 있어요.
개개인의 셀러브러티들 재조명하고 자유롭게 패러디하는 재미죠. ‘SNL’의 소재와 앞으로의 먹거리도 호스트의 잠재력을 섹슈얼하게 패러디하는 거예요.”

-초기에 박재범과 아이돌스타를 비롯해서 ‘SNL’이 호스트로 참여한 셀러브러티의 매력을 극적으로 뽑아냈다는 점에는 동의해요. 예전에 배우 김상경 씨도 ‘SNL’에 출연한 이후 생각도 커리어도 훨씬 자유로워졌다고 하더군요. 일종의 통렬하고 귀여운 성인식이랄까요. 특히 기억에 남는 스타가 있습니까?

“최근에 방영한 이하늬 씨의 경우가 완성도가 아주 높았어요. PD가 이하늬라는 인물을 다각도로 분해해서 코너별로 성공적으로 담았거든요. ‘SNL’은 호스트의 ‘급’에 연연하지 않아요(웃음). 다재다능하고 열린 호스트가 자유롭게 자기를 던지고, 그걸 시청자가 즐기면서 색다른 웃음과 호감을 호환하는 구조예요.”

-2011년 tvN으로 이적 후, 4년 반 만에 상무로 초고속 승진해서 CJ E&M 내부에서도 놀라워했다고 들었어요.

“(웃음)현재 임원이지만, PD랑 비슷한 편이에요. 제 역할은 회사 운영이라기 보다는 각각의 프로그램을 잘 운영해서 브랜드를 키워가는 거예요. tvN이라는 브랜드를 성장시키는 거죠.”

-꿈이 무엇인가요?

“꿈이 계속 바뀌어요. 대학 때는 가수가 되고 싶었는데, 가수 될 실력은 아니라는 판단에 음악을 만드는 방송 PD가 되기로 했어요. PD가 되고 나서는 최고 고지인 시청률 48%까지 찍어봤죠. 많은 프로를 거쳤지만, ‘1박 2일'이 정점이었어요. 현재 채널 관리자로서는 tvN을 하나의 채널이 아니라 독특한 정체성을 가진 브랜드로 성장시키고 싶어요.”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 3가지는 무엇인가요?

“첫 번째는 20대에 가수를 포기하고 PD를 한 것. 두 번째는 2010년에 제가 2년 동안 맡았던 ‘1박 2일'을 나영석에게 넘긴 것, 세 번째는 2011년 KBS에서 tvN으로 회사를 옮긴 것.

젊어서 15년을, 신변 보장되는 준공무원 신분으로 KBS 예능을 익히며 보낸 것도 행운이고, 이후 5년을 1년 단위 계약으로 젊은 조직의 임원으로 보내고 있는 것도 행운이죠. 남자로서 뜨거운 물, 찬물 다 담가 본 느낌이에요. 시간이 지나면 허무할 수도 있겠지만, 현재는 이 공간에서 창피하게 안주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있습니다.”

그는 KBS 시절 ‘1박 2일'을 나영석 PD에게 넘긴 것을 인생에서 두 번째 잘한 일로 꼽았다./사진=장련성 기자
그는 KBS 시절 ‘1박 2일'을 나영석 PD에게 넘긴 것을 인생에서 두 번째 잘한 일로 꼽았다./사진=장련성 기자


-tvN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나영석 PD가 와서 만든 ‘꽃보다 할배' 시리즈 첫 방송 시청률이 나온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신원호 PD는 그때 먼저 ‘응답하라' 시리즈로 성공적으로 안착했고, 나영석은 tvN으로 와서 부담을 많이 느끼던 때였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자기 주전공으로 정면 돌파를 한 거예요.

마침 제가 입사준비생들 앞에서 특강을 하던 중에 시청률 문자를 받았는데, 그 순간 눈물을 주르륵 흘렸어요. 다들 “저 사람이 미쳤나?”하는 눈초리로 봐서 설명을 해줬지요. KBS에서 온 나영석이랑 2011년 tvN 공채로 들어온 주니어 PD들이랑 서로 처음 손발 맞춰서 한 작품이 대박이 났다고요.

시청률보다 그렇게 다른 문화에서 시작한 낯설고 처음인 사람들이 팀을 이뤄서 뭔가를 해냈다는 게 기뻤어요. 서로 믿을 수 있는 선후배가 됐다는 게 말이지요.”

-마지막으로 꿈이 계속 변한다고 했는데, 개인적인 넥스트 드림은 무엇인가요?

“제가 2011년 3월에 KBS에서 tvN으로 왔는데, 그때 소망이 여유가 되면 뮤지컬을 해보고 싶다, 였어요.

그리고 만약 로또를 맞아 큰돈이 생기면 축구 구단주가 되고 싶은 것도 꿈이에요. 축구도 엔터 산업을 능가하는 비즈니스죠. 2010년에 영국 런던에 유학 갔었는데, 뮤지컬 공부하러 간다는 명목으로 속내는 축구 보고 싶은 맘이 컸어요(웃음). 60살 정도에 은퇴하면 영국에 가서 8부 리그쯤 되는 험블한 축구팀 인수해서 구단주 하며 여생을 마무리하자, 는 꿈을 꾸며 삽니다.”